지금이야 세계적으로 프로복싱을 위협하는 인기스포츠로 자리 잡았지만 종합격투기도 한 때는 '막싸움' 취급을 받으며 스포츠 팬들에게 철저히 무시를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에 세계 최대규모의 종합격투기 단체로 성장한 UFC에서는 대회를 거듭할수록 틀을 잡아가고 규칙을 엄격히 정하면서 종합격투기를 프로 스포츠의 한 장르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2003년에 창설된 최초의 종합격투기 단체 스피릿MC가 5년 동안 18번의 대회를 치렀지만 2008년 대회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스피릿 MC가 문을 닫은 2010년에 창설된 로드FC가 한국 종합격투기의 명맥을 이으면서 오늘날까지 국내 최대 규모의 격투기 단체로 군림하고 있다. 이 밖에 TFC(구 탑FC), AFC(구 엔질스파이팅챔피언십) 같은 단체들도 꾸준히 대회를 개최하며 몸집을 키우고 있다.

기본적으로 복싱의 틀을 따온 종합격투기는 각 체급마다 챔피언이 존재하고 챔피언이 가장 강한 도전자를 상대로 방어전을 갖는 형식으로 단체를 운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프로레슬링 방식의 대립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챔피언은 정기적인 방어전을 통해 팬들에게 꾸준히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로드FC 라이트급 토너먼트 'Road To A-Sol'의 '끝판왕' 권아솔은 2016년 12월 2차방어전 이후 무려 2년 3개월 동안 방어전을 치르지 않았다.

2년 넘게 토너먼트 진행되는 동안 방어전은커녕 슈퍼 파이트도 전무
 
 권아솔은 로드FC를 대표하는 간판스타다.

복서 권아솔 ⓒ 로드FC

 
로드FC는 2016년 11월 우승상금 100만 달러가 걸린 라이트급 토너먼트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권아솔은 라이트급 챔피언 혹은 한국 대표 자격으로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17년1월 대회의 정식 명칭이 '로드 투 아솔'로 정해졌다. 도전자들이 토너먼트를 거쳐 최후의 1인을 가린 후 최종 승자가 '끝판왕' 권아솔과 100만 달러와 라이트급 챔피언 벨트를 걸고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권아솔은 챔피언 자격으로 결승에 자동 진출했다.

실제로 권아솔은 2016년 2차 방어전을 끝으로 한 번도 '경기를 위해' 케이지에 오른 적이 없다. MBC의 격투 예능 <겁 없는 녀석들>의 멘토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케이지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SNS에 "누가 올라오든 가볍게 이겨주마"라며 챔피언의 자신감을 보여준 게 전부였다. 물론 직접 기획한 프로젝트였지만 로드FC는 '로드 투 아솔'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들이 키워낸 최고의 히트상품을 써먹지 못했다.

이번 토너먼트에서 최종 도전자를 가리는 '최후의 2인' 중에는 UFC 라이트급 챔피언 하빕 누르마고메도프의 사촌형 샤밀 자브로프가 있었다. 하빕이 사촌형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을 찾자 권아솔은 하빕을 거칠게 도발하며 맞대결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축구로 치면 K리그 득점왕이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에게 "진짜 축구가 뭔지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권아솔에게 도전(?)할 100만불 토너먼트 최후의 1인은 자브로프를 3라운드 KO로 잠재운 만수르 바르나위로 결정됐다. 바르나위는 권아솔에게 도전할 자격을 따내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32강부터 5경기를 치르고 올라왔다. 같은 기간 권아솔은 단체에서 붙여준 '끝판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끔씩 훈련영상을 공개하거나 SNS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강자들을 도발했다. 물론 자신의 타이틀을 위협받는 상황은 전혀 없었다.

로드FC 무제한급 챔피언 마이티 모는 작년부터 진행된 무제한급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의 벨트를 반납했다. 올해 한국 나이로 50세가 된 모는 작년 5월 8강전에서 길버트 아이블에게 서브미션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물론 5월 제주도에서 열릴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권아솔이 바르나위를 꺾고 챔피언 타이틀을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승패를 떠나 2년 넘게 방어전조차 하지 않았던 권아솔을 '용기 있는 챔피언'으로 기억할 격투 팬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두 체급에서 14번 방어전 성공하고도 타이틀 박탈 위기
 
 최현미는 통일이 되면 대동강으로 드라이브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복서 최현미. ⓒ 김광섭

 
북한에서 살던 2002년 처음으로 글러브를 낀 '새터민 복서' 최현미는 2004년 탈북 후 한국에서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며 복싱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자복싱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체택되지 않으며 최현미는 목표를 잃어 버렸다. 다행히 곧바로 프로 전향을 선택한 최현미는 2008년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 중국의 쉬춘옌을 판정으로 꺾고 WNBA 여성 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프로 데뷔전에서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천재소녀'의 등장이었지만 가뜩이나 인기가 없는 여자복싱에서 새터민 복서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았다. 그러던 2010년 1월 국민예능 <무한도전>에서 일본의 텐코 츠바사와 타이틀전을 치르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다루며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7차 방어까지 성공한 최현미는 2013년 슈퍼 페더급 전향을 위해 벨트를 반납했다.

슈퍼 페더급 데뷔전에서 라이카 에미코를 꺾고 챔피언에 오른 최현미는 슈퍼페더급에서도 승승장구했다. 2016년5월에는 광명동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3차 방어전에서 콜롬비아의 다이아나 아얄라를 꺾고 WBA와 WBF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프로 데뷔 후 17경기를 치른 최현미는 데뷔 2번째 경기에서만 한국 선수 김교민과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아직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패 챔피언'이다.

하지만 페더급과 슈퍼페더급에서 각각 7차 방어씩 성공한 최현미는 현재 타이틀 박탈 위기에 놓여 있다. WBA 규정상 챔피언은 의무적으로 6개월에 한 번씩 방어전을 치러야 하는데 최현미가 오는 4월까지 타이틀전을 치르지 못하면 WBA 규정 6개월은 물론 유예기간 3개월도 지나게 된다. 오픈경기에 출전하는 선수 대전료를 포함해 대회를 개최하려면 약 1억2000만 원의 비용이 필요하지만 최현미는 아직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

물론 냉정한 프로 스포츠의 세계에서 인기가 없는 종목은 기업과 팬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스포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챔피언은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 2년이 넘도록 방어전 한 번 치르지 않은 권아솔은 여전히 챔피언 타이틀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고 세계 최고 권위의 권투기구에서 10년 동안 14번이나 방어전을 성공시킨 최현미는 타이틀을 박당 당할 위기에 놓인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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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격투기 로드FC 프로복싱 권아솔 최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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