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 <해피투게더>(1997)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왕가위 감독 <해피투게더>(1997)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왕가위 감독

 
몇 달 전 존경하는 한 평론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래 영화 좋아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배우 '덕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이 말을 듣자마자 내 자신은 어쩌다가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업으로까지 삼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내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배우 때문은 아니었다. 20대 끝자락에 한 감독의 영화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애초 사회학을 전공하려는 계획을 틀어 영상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영화 학교에 들어가 영화 이론도 아니고 영화 제작을 공부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간 영화에 대한 동경도 없었고, 딱히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영화를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후, 부족한 기초를 메우고자 지금도 발버둥치면서 노력 중이다. 

배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데 적잖은 영화를 끼친 배우는 한 명있다. 2003년 만우절 거짓말처럼 홀연히 사라진 장국영. 나 말고도 성별을 불문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만인의 연인 장국영.

내 어릴적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두 남자
 
 서극 감독의 <금옥만당>(1995)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서극 감독의 <금옥만당>(1995)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서극 감독

 
고백하건대, 내 어릴적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두 남자를 꼽자면, H.O.T.의 토니안과 장국영이다. 토니안이 "단지 널 사랑해"라는 소절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전에도 좋아했던 연예인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열렬히 사모했고 결혼까지 하고 싶었던 연예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H.O.T. 토니안은 내게 인생의 전환점을 안겨줄 정도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첫사랑이었다. 좋아한 지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토니안을 보면 좋고 애틋하다. 지금도 잘 살고 있지만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잠깐 좋아했던 장국영은 좀 달랐다. 장국영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중국어 수업시간에 본 영화 때문이었다. 중국어를 담당하던 당시 담임 선생님은 수행평가로 중국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셨는데, 볼 영화들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 <홍등>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장국영이 출연한 <패왕별희>. 당시만 해도 영화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없던 나는 이왕 볼 거 유명 스타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려고 비디오 가게에서 <패왕별희>를 빌렸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주 잠깐 장국영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초절정 동안 미모를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홍콩 영화가 극장을 휩쓸던 시절, 장국영은 한국에만 수많은 팬을 보유한 아시아 최고 스타였고, 모두가 세월이 완전히 비껴간 듯한 그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당시 철부지였던 나 또한 장국영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 TV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장국영이 나의 아버지보다 한 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빠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좋아할 수 없다며, 그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장국영의 실제 나이에 큰 충격을 받다
 
 천카이거 감독 <패왕별희>(1993)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천카이거 감독 <패왕별희>(1993)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패왕별희>를 볼 때도, 어린 시절 장국영의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던 찜찜한 기억이 떠올라 약간 망설여지긴 했다. 그러나, 이미 선생님께서 과제로 봐야 할 영화를 정해 놓은지라, 대안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붉은 수수밭> <홍등>을 보면서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을 가진 뛰어난 영화라고 극찬했겠지만,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그 때 나로서는 재미 없을 것같은 느낌이 오는 영화를 보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튼 이런저런 감정을 뒤로하고 <패왕별희>를 보게된 내 마음 속에 장국영이 살짝 들어왔다. 극중 여장 전문 경극배우로 출연한 장국영은 캐릭터 특성상 짙은 분장을 자주 하고 나왔는데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지' 감탄을 하면서 봤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만 해도 장국영에 홀딱 빠진 것은 아니었다.

장국영에 완전히 반해 버린 것은 <야반가성>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다. <야반가성>은 중국어 수업시간에 본 영화였는데, <오페라의 유령>의 홍콩버전을 연상시키는 두 남녀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내용은 썩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극중 장국영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패왕별희>의 장국영도 아름다웠지만,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야반가성>의 장국영이 더 멋지고 눈이 부셨다.
 
 우인태 감독 <야반가성>(1994)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우인태 감독 <야반가성>(1994)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우인태 감독

 
여기에 담임 선생님은 <야반가성>에서 장국영이 불렀던 OST인 '일배자실거료니(一輩子失去了你)'를 가르쳐 주며, 가뜩이나 장국영 때문에 잠 못자는 불타는 마음에 기름을 끼얹으셨다. 어느새 장국영이 부른 '일배자실거료니'에 중독된 나는 선생님께 이 노래가 담긴 '총애(寵愛)' 음반 테이프를 빌려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했고, 그 테입을 받아 공테이프에 소중히 녹음했다. 지금은 그 공테이프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국영이 출연했던 영화 OST가 담긴 '총애' 수록곡들은 지금도 시간날 때마다 듣는 애창곡이다. 

장국영에게 완전히 매료된 나는 그가 나온 출연작들을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왕가위 감독과 양조위가 함께한 <해피투게더>를 봤는데, 그때만 해도 동성애에 대한 어떤 이해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장국영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좋았다. 

이 때 나는 결심했다. 꼭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장국영과 만나리라. 하지만 내가 고3이 된 이듬해 장국영은 만우절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이 생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 뒤로 장국영을 서서히 잊기 시작한 나는 영화를 시작하면서 다시 장국영을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 장국영의 출연작들을 챙겨 본다. 지난해 연말, 장국영이 너무나도 생각나서 그의 영화들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왕가위 감독 <아비정전>(1990)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왕가위 감독 <아비정전>(1990)에 출연한 배우 고 장국영ⓒ 엔케이컨텐츠

 
장국영의 대표작으로는 크게 <영웅본색> 시리즈와 <천녀유혼>, <아비정전>, <백발마녀전>, <패왕별희>, <동사서독>, <해피투게더>를 꼽을 수 있다. 수많은 씨네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이 영화들도 좋지만, 요즘은 장국영이 환하게 웃으면서 끝나는 <종횡사해>, <동서서취>, <금지옥엽>, <금옥만당> 같은 따뜻한 로맨스나 코미디물이 더 좋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장국영의 열렬한 팬임을 고백하는 주성철 <씨네21> 편집장도 그의 저서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에서 장국영의 행복하고 밝은 미소가 돋보이는 초창기 영화들을 볼 때 더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장국영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영화에서 그는 대부분 영화 내내 상처받고 아파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존재였다. 그래서 당분간은 영화에서라도 환하게 웃는 장국영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그때는 비련함으로 가득한 장국영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겠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보고 싶은, 그 시절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만인의 연인 장국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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