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주)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영화가 있다. 이야기 속 인물의 삶이 너무나도 처절해서 구할 수만 있다면 스크린을 찢고서라도 빼내오고 싶은 영화 말이다. 지난주 본 영화 <가버나움>의 주인공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의 삶이 꼭 그랬다. 열두 살 정도의 아이가 내던져진 거리의 삶이 어찌나 삭막하고 버겁던지, 그대로 극장을 나와 웃고 떠드는 사람 가득한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한 나는 손가락 틈새로 겁나는 무엇을 몰래 지켜보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숨죽여 자인의 삶을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아이의 삶을 이토록 편안한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미안하고 죄스런 일이었는지, 나는 여적 그 때의 감정을 기억한다. 이대로 아이가 부서져버리면 나는 어떤 심정으로 상영관 문을 나설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아이는 놀랍게도 제 앞에 닥쳐오는 난관을 어찌어찌 당해냈다. 고작 열두 살짜리 작은 몸 안에 제 삶을 지탱하는 저만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감사하여 나는 그만 속절없이 울고 말았다. 주제넘게도.

'나를 왜 낳았냐'며 제 부모를 고소한 아이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저 스스로를 건사하기 벅찬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분)을 제외하곤,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의 험난한 삶 가운데 그를 감싸주는 어른은 누구도 없다. 그를 변호하겠다고 찾아온 변호사(나딘 라바키 분)조차 그를 보며 웃어주지 않는 설정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저 스스로를 건사하기 벅찬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분)을 제외하곤,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의 험난한 삶 가운데 그를 감싸주는 어른은 누구도 없다. 그를 변호하겠다고 찾아온 변호사(나딘 라바키 분)조차 그를 보며 웃어주지 않는 설정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린나래미디어(주)

  
<가버나움>은 법정에 선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떤 이를 칼로 찔러 징역형을 선고받고 소년원에 수감된 자인이란 아이가 그 주인공이다. 소년이 법정에 다시 선 이유가 눈길을 잡아끈다. 제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며, 저를 낳은 제 부모를 고소했단다. 제게 묻지도 않고 저를 낳아 죽기보다 괴로운 삶을 살게 한 책임을 묻겠다는 게 자인의 주장이다. 도대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이었기에 열두 살 아이가 제 부모를 고소한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영화는 곧 자인이 겪은 나날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펼쳐낸다.

자인은 레바논 어느 빈민촌 아파트에서 형제들과 부대끼며 자랐다. 무능력한 부모는 어린 자식들을 거리로 내몰아 돈을 벌게 시킨다. 자인은 동생들과 좌판을 벌여 주스를 팔다가는 어둠이 내려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 분)가 월경을 시작하자 자인은 불안해진다. 월경을 했다는 사실을 부모가 알아채면 일찍부터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 동네 사내놈에게 사하르를 팔아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은 현실이 되고, 부모는 자인 몰래 사하르를 시집보낸다. 고작 닭 몇 마리에 동생을 팔아치우다니, 속이 뒤집힐 일이다. 남몰래 모은 돈을 챙겨 사하르와 도망칠 계획까지 세웠지만 부모가 한 발 빨리 동생을 팔아치우자 자인은 절망감을 지울 길 없다.

열두 살 아이가 짊어진 냉혹한 삶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분)를 돌보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분)를 돌보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 그린나래미디어(주)


이후 영화는 분노한 자인이 집을 나가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바깥세상에서 그가 겪는 일을 화면 위에 고스란히 펼쳐내는 것이다. 거리에서 낯선 이를 상대하던 자인이지만 그래봐야 열두 살 꼬마다. 당장 일자리를 찾는 것부터 먹고 자는 일까지, 어느 하나 쉽지가 않다.

그런 자인이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분)과 만난다. 놀이공원에 딸린 식당에서 청소일을 하는 그녀는 어린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분)를 남몰래 숨겨 키운다. 돌도 되지 않은 요나스를 화장실 한 칸에 숨겨놓고서 일하는 틈틈이 들여다보는 게 라힐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신분증을 위조해 체류하는 그녀에게 애를 봐줄 보모를 구하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라힐과 자인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라힐은 자인에게 요나스를 맡기고, 자인은 라힐이 오기까지 요나스를 돌본다. 빈민촌 쪽방에도, 자인의 인생에도, 볕이 드는 날이 왔는가 싶다. 그러나 예고된 불운이 그들의 삶을 비집고 들이닥친다. 일터에 나간 라힐이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자인이 겪게 될 고난이야 말해 무엇하랴. 요나스를 들쳐 업고 라힐을 찾아보지만 행방은 묘연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니 약을 탄 음료를 만들어 팔아보지만, 수입이라고 해봐야 별 볼 일 없다. 요나스를 버리고 도망칠까, 아이를 달라는 브로커에게 넘겨버릴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도 저를 보며 웃는 요나스를 보고있자면 마음이 서지 않는다.

아무도 살피지 않는 아이는 같은 얼굴이 된다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영화 내내 다른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영화 내내 다른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 분).ⓒ 그린나래미디어(주)

 
<가버나움>을 보며 두 영화가 떠올랐다. 하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 디즈니월드 맞은편 호스텔에 사는 빈민가 아이들의 이야기다. 영화 내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불안감을 지울 길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 무니와 그 패거리의 즐거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져나갈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무니와 친구들이 제가 사는 세상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다시는 그렇게 웃어대지 못할 거란 걸 영화를 보는 모두가 알았으리라. 그래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웃음은 위태롭고 불안하다.

<가버나움>의 자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활짝 미소 지었다. 그 장면을 보고서야 관객들은 자인이 영화 내내 거의 웃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열두 살 난 자인이 동생과 요나스를 지키려던 과정이 어찌나 처절했는지, 관객은 아이다운 웃음 한 번 보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편집도, 감정을 담지 않은 촬영도 자인 앞에 놓인 현실의 버거움을 강조하고 있었다.

요나스를 지키기 위해 자인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디즈니월드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무니를 지나치던 이들처럼, 누구도 자인에게 관심이 없다. 영화 내내 어느 누구도 자인의 삶을 들여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가 꼭 그런 영화였다. 아무도 살피지 않는 아이들이 어떻게든 제 삶을 감당하려 고군분투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미국과 레바논, 또 일본과 한국에서 어른들이 보살피지 못하는 아이들은 쉽게 같은 얼굴이 된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가 너무 빨리 많은 것을 알아버리고 금세 시들어버린다. 모든 것을 경계하고 쉽게 분노하는 자인의 모습이 무니의 미래란 걸 나도 당신도 알고 있다.

울지 말고 인정하라,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나딘 라바키 감독은 극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몇 안 되는 창작자란 생각이 든다.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나딘 라바키 감독은 극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몇 안 되는 창작자란 생각이 든다.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건 자인의 삶만이 아니다. 우리는 자인의 부모 역시 알지 못한다. 자인을 따라 그의 부모를 비난하던 우리는 이내 그 비난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다름 아닌 자인의 행동을 통해서다.

영화는 이를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세상에 던져진 자인은 스스로 부모의 행동을 따라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자인의 부모는 어린 자인의 동생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발목을 줄로 묶어놓곤 하였다. 자인은 이를 못 마땅히 여겨 동생을 묶은 줄을 몰래 풀어주곤 했는데, 그가 요나스를 책임지게 되자 그는 어느새 그의 부모가 그랬듯 요나스의 발목을 끈으로 묶어 두고 제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법정에서 "당신이 내 상황이었다면 달랐을 것 같으냐"고 "오직 나만이 내 자신을 비난할 수 있노라"고 절규하던 자인의 어머니를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언니였을 그녀가, 다 자라지 않은 제 딸을 팔아치우듯 시집보내기까지 어떤 일들을 겪었을지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탈북자이기도 한 장진성 시인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란 시가 있다. 백 원에 딸을 판다는 팻말을 세워두고 딸을 팔던 청각장애 여인, 팔리는 딸 아이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어미는 땅바닥만 내려 보았다고 했다. 지나치던 어느 군인이 딸이 아니라 모성을 산다며 백 원을 쥐어주자, 여인은 딸을 판 그 돈으로 밀가루빵을 사들고 허겁지겁 뛰어와서는 이별하는 딸애의 입 안에 그 빵을 밀어 넣고서 '용서하라'며 통곡했다고 했다.

누가 나쁜 것인가. 딸을 파는 여인인가, 딸을 사는 군인인가. 북한 시장의 청각장애 어미와 <가버나움> 속 자인의 어머니가, <아무도 모른다>의 집 나간 부모와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딸을 내주던 어머니가 또 얼마나 닮아 있던가를 생각해본다. 그들과 나와 내 어미는 과연 다른가?

내가 사는 이곳도 가버나움이다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열두 살 아이에게 어떤 손길도 내밀지 않는 세상이 '가버나움'이 아닐까?

영화 <가버나움> 한 장면. 열두 살 아이에게 어떤 손길도 내밀지 않는 세상이 '가버나움'이 아닐까?ⓒ 그린나래미디어(주)


가버나움은 기독교 신약경전 <마태복음> 가운데 등장하는 도시다. 예수가 사랑하여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이 도시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죄악이 끊이지 않아 끝내 예수의 저주를 받고 만다. 신의 사랑을 받았으나 인간의 죄악으로 몰락한 도시, 어느덧 잊혀버린 그 도시의 이름을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다.

내가 사는 이 쓸쓸한 도시에 예수가 나타나 기적을 행한다 해도 나는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예수가 기적을 행할 법한 곳을 알지 못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면서도 누구의 죽음과 누구의 절망과 누구의 지옥을 나는 모르는 것이다. 그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 도시에선 누구도 누구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이곳엔 너무 많은 불행이 있어, 나는 그 불행을 평범한 무엇으로 여긴다. 2014년 송파구의 세 모녀가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2017년엔 충청북도 증평군에서 사망한 지 두 달이 지난 시체 두 구가 발견됐다. 40대 어머니와 네 살 딸의 시신이었다. 그 한 달 뒤인가.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20대 남성과 두 살짜리 아이 시신이 발견됐다. 지난달에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 반지하방에서 치매를 앓던 노모와 50대 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이 죽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가버나움은 레바논 베이루트도, 다른 어느 도시도 아니다. 자인이 사는 곳이며, 무니가 사는 곳이고,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온다던 엄마를 기다리는 아키라와 교코, 시게루와 유키가 사는 곳이다. 송파구 세 모녀와 증평군 모녀, 구미시 부자와 망우동 모녀가 죽은 도시다. 그리고 나 역시, 가버나움에 산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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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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