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부산이 고향인 친구는 서울에 올라와 반지하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친구 몇 명과 함께 집들이를 하고 며칠 지난 뒤, 그 친구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새벽녘에 스산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자신의 반지하방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 남자의 하체 뒷모습이 보였다. 

공포에 휩싸여 소리조차 나지 않은 상황에서 친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다. 괴성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소리에 놀란 남자가 얼른 다시 몸을 빼서 도망가는 바람에 나쁜 일은 겪지 않았지만, 후유증은 꽤 오래 갔다. 친구는 며칠 동안 누군가 창문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 같았지만, 설마 나쁜 일이 생길까 싶어 찝찝함을 넘겨버린 것에 대해 자책했고, 감옥에 갇힌 것 같다며 싫어하던 쇠창살을 달았으며, 쇠창살은 단 이후에도 혼자 지내는 것이 무서워서 지방에 살던 여동생을 불러서 한동안 함께 지내야 했다.
 
이 사건은 23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땐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가 자책하고, 쇠창살을 설치해 스스로 안전을 지켜야 하며, 그럼에도 공포의 여진은 계속되어 안심할 수 없었다. 23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난 화요일에 방송된 < PD수첩 >에서 지금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안전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예민하다고?

프로그램은 얼마 전 있었던 부산대 여대생 기숙사 사건으로 시작된다. 범인은 여대생 기숙사에 들어가 방마다 문을 열려 시도하며 범행 대상자를 물색했다. 오랜 시간 배회하다가 급기야 복도에서 만난 한 여학생이 폭행을 당한다. 그 사이, 공포를 느낀 여대생들이 비상벨을 눌렀지만, 묵묵부답. 안전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나중에 범인을 잡고 보니 그 학교 남학생이었다.
 
그렇다면 그 후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을까?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최첨단 보안시설을 갖추겠다는 총장의 결연한 인터뷰와는 달리, 사건 이후 학교 측은 경비 인력을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린 것 외에는 눈에 띄는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학생들에게 문단속과 비밀번호 관리를 잘할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안 당하려면, 너가 조심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안전 시스템을 만들고 가동하기 위한 비용문제에 난감함을 표현하면서 은근슬쩍 학생들 탓을 한다.

"이 사건이 이렇게 전국에 방송을 탈 일인가? 학생들이 너무 예민한 것 같다."

23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나아진 것은 없고 오히려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안전하게 살게 해 달라는 여성들의 당연한 주장을 예민하게 유난 떤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주거 안전이다. 기본적인 안전을 위협받고, 목숨마저 위협받는 공포를 예민함으로 치부하다니. 실제로, 안전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일상적으로 '예민함' 아니면 '남녀 성대결'로 왜곡되어 버린다. 부산대학교에서도 여학생들의 요구가 담긴 대자보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걸리는 족족 찢겨지고 있었다.
 
성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상담한 결과, 범죄자들이 왜 하필 그 여성이었느냐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한 답이 있다고 한다. "혼자 사는 여성이어서." 여성은, 더구나 혼자 사는 1인 가구 여성은 범죄 대상의 첫 번째 타깃이 되고 있는 셈이다. < PD수첩 >에 따르면, 실제 33세 이하 청년 여성 1인 가구의 경우 신체나 재산상의 피해를 당할 확률은 남성 가구에 비해서 2배 이상 높았고, 가택침입 등 주거 피해를 입을 확률은 11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학교 밖 1인 가구 여성들의 주거 공간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새벽 3시에 술 취한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는 한 여성의 인터뷰는 결코 '일부 여성이 겪은 그저 운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도어락 버튼 누르는 소리... 힘으로 문을 열려 했던 남자
 
 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5년 전, 독립해서 혼자 살 때였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집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 시간에 도어락 버튼을 누를 사람이 없었으니까. 잘못된 번호를 누르니 삐리릭 소리가 났다.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누구세욧!"하고 일부러 앙칼지게 물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혀가 꼬부라진 남성이 "어이구, 죄송합니다. 우리 집인 줄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앞집으로 향했다. 진짜 그가 앞집에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온몸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작년에 엄마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되면서는 더한 일도 있었다. 윗층이 이사오면서 공사를 했고, 그날도 바닥 공사를 하느라 꽤 시끄러웠다. 저녁 6시에 공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5시 반쯤 우리집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가 틀리자 삐리릭 소리가 났고, 동시에 밖에서 한 남자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는 문고리를 돌리더니 힘으로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공포가 해일처럼 덮쳤다.

문득 윗층에 공사하러 온 인부가 집을 착각했나 싶어서 얼른 "누구세요?"하고 물었다. 인부라면 내 목소리를 듣고 당연히 상황을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계속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내가 몇 번이나 '누구시냐, 대답을 하라'고 크게 물어도 막무가내였다. 철컥철컥 소리가 날 때마다 내 심장은 사정없이 방망이질을 했다.

7번 정도 철컥거렸을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문을 쾅 치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그는 죄송하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윗층에 공사를 하러 온 인부가 정말 착각한 것인지 아닌지, 그날의 해프닝의 진실은 잘 모르겠다. 문을 열어서 확인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선명한 건, 그 순간 느낀 공포다. 아파트여서 그나마 안전하다고 여긴 믿음도 그날 깨졌다.
 
범인은 옆집 남성이거나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경비였다
     
 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 PD수첩 >의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 중 한 장면ⓒ MBC


< PD 수첩 >에서도 평소 겁이 많아 안전하다고 여긴 지역에 집을 얻은 한 중년 여성이 출근길에 살해된 사건이 나온다. 다른 60대 여성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산책길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두 여성 모두 혼자 살거나 여성으로 이루어진 가구였고, 범인은 바로 옆집 남성이거나,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경비였다.

안전하다 여긴 동네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출근길에, 산책길에 여성은 목숨을 잃는다. 결코 과장된 공포가 아닌 것이다. 난 단지 운이 좋아서 당하지 않았을 뿐, 이런 위험과 공포는 내 주변에도 늘 존재한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잠재적 불운이다. 마치 재수 없으면 걸리는 러시안 룰렛 같은.
 
< PD수첩 >은 이런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처벌할 법조차 미흡하다는 점을 고발한다. 성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이 이미 버젓이 존재하는 시스템 안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관련법들은 국회에서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대상범죄근절 추진단'은 야심차게 출범만 하고, 7개월째 단장이 공석이다.

나아지는 것 없이 제자리걸음인 여성들의 주거 안전 대책. 그 사이, 여성들의 피해와 공포는 커지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이 안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시끄럽게 사건을 키운다고 한다.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남녀갈등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이번 주 < PD수첩 > '문고리를 흔드는 손' 편을 보고 난 뒤, 가슴 아픈 두 개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부산대학교 관계자가 자신의 학교에서 벌어진 성범죄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게 전국적으로 방송을 탈 일인가?"

궁금하다. 그러면 전국적으로 방송을 탈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른 하나는 한 여학생의 차분하면서도 절박한 호소가 담긴 질문이다.

"안전하게 살고 싶은 것이 과한 욕심인가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