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을 연출한 이한 감독.

영화 <증인>을 연출한 이한 감독. ⓒ 롯데엔터테인먼트

 
2016년 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증인>을 심사했던 이한 감독은 내심 욕심을 내고 있었다. "감정을 많이 움직이고, 새로우면서도 좋다"는 느낌을 안고 있던 그는 현재 투자배급사의 영화화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그렇게 삶에 지친 변호사 순호(정우성)와 자폐를 앓는 소녀 지우(김향기)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완득이>(2011), <우아한 거짓말>(2013) 등 작품에서 특유의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 이한 감독에게도 <증인>은 나름 큰 도전이었다. "법정극은 개인적으로 처음 하는 것이었다"며 "잘 모르는 분야지만 도전하고 싶은 용기가 날 정도로 원작 시나리오가 줗았다"고 말했다.

인간에 대한 믿음

"사실 예전에 법정 영화 시나리오 연출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못한다고 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였고 자신이 없었거든. 근데 이번엔 잘 몰라도 도전하고 싶었다. 잘 찍고 싶었다. 원작이 너무 좋았는데 각색할 때는 조금 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의견이 가진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캐릭터들도 (원작보다) 다양하게 넣었다. 순호의 움직임을 따라 감정이 흐르게 말이다."

그래서 추가된 인물이 극중 순호의 대학 동기이자 현재에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아래 민변)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인(송윤아)과 순호의 아버지(박근형)였다. 두 캐릭터는 현실에 타협해 민변의 길을 접고 거대 로펌에 들어간 순호의 양심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되묻게 하는 역할을 한다. 생활고와 빚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를 버린 순호는 그래서 영화 내내 갈등하다가 결국 지우를 만나며 폭발하게 된다. 이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리는 게 이한 감독의 주요 임무기도 했다. 

사실 변심하거나 예전의 길과 상반된 길을 택한 사람이 더 돌아오기 어려운 법. 그만큼 스스로 합리화를 강하게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감독은 동의했다. "영화에서 다 설명하진 않지만 현실에서 상처받고 어떤 벽을 느꼈기에 순호는 신념을 저버리게 됐을 것"이라며 이한 감독은 "수인과 아버지, 지우가 신념을 되찾게 하는 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작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 사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배우분들에겐 그걸 강조하진 않았다. 연기하는 데 족쇄가 될까봐. 다만 한 가지만 말했다. 정우성씨에겐 순호가 너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세월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우성씨도 '순호가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간단하게 물으시더라. 촬영 초반 '발걸음이 무거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순호 같은 표정을 지어달라'고 뜬금없는 디렉션을 했는데도 배우는 해보겠다고 하시더라. 나머지는 시나리오 안에 이미 답이 있다고 생각했고 우성씨도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영화 <증인>의 한 장면

영화 <증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알기 위한 노력들

또 하나의 과제가 있었다면 바로 김향기가 연기한 지우였다. 이미 자폐가 있는 인물이 여러 영화에서 묘사된 만큼 이한 감독 역시 허투루 할 순 없었다. "실제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분을 인터뷰하고, 책도 보면서 제가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며 이한 감독이 설명을 이었다. 

"(나는 자폐를) 불치병으로 생각하고 있었더라. 스펙트럼 장애로 굉장히 고생하는 분도 있지만 노력하면서 비장애인과 소통하는 분들도 많았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선입견이란 게 참 무책임하다는 걸 느꼈다. 실제로 만나면서 도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특성과 개성이 있듯이 스펙트럼 장애인들도 굉장히 다양한 모습이더라. 그런 분을 전문적으로 대하시는 의사 선생님도 만나고 그랬다.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분들이 하는 클라리넷 앙상블이 있는데 그 모임을 종종 찾았다. 먼저 제게 인사하고 말을 거시더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 이 분들도 다른 사람과 충분히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랬기에 이한 감독은 자폐를 앓는 캐릭터가 등장한 소위 유명한 영화를 거의 찾아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딱 하나 열심히 판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템플 그랜든>이란 작품이었다"며 감독은 "실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교수의 이야기를 영국 BBC가 영화화한 건데 우리 영화에 도움이 된 장면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동시에 일련의 과정에서 이한 감독은 하나의 화두를 갖게 됐다. 바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증인>에서도 이 물음에 감독 나름의 결론이 묘사되기도 한다.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흔히들 자폐는 비장애와 섞일 수 없다고 하시는데 제가 공부한 걸 토대로 보면 충분히 가능하고 좋아질 수 있겠더라. 물론 장애인 입장에선 처음엔 그게 고통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결말에 지우를 특수학교에 보내는 설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이미 비장애인 버금가는 지능이 있는 아이가 어디에 있으면 행복할까 생각하며 지금의 결론을 내렸다. 비장애인과 함께 사는 게 좋은 거야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겠더라. 조금이라도 지우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영화 <증인>을 연출한 이한 감독.

"기본적으로 전 사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배우분들에겐 그걸 강조하진 않았다. 연기하는 데 족쇄가 될까봐. 다만 한 가지만 말했다. 정우성씨에겐 순호가 너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세월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 롯데엔터테인먼트

 
인터뷰 말미 남은 질문을 던졌다. 바로 순호가 속한 로펌 리앤유에 대한 실제 모델에 대한 물음이었다. 영화 첫 장면 순호가 광화문 세종대로를 건너는 장면, 리앤유가 변호하는 사건 등을 종합해 유추하면 지금의 김앤장을 은유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약자보다는 기득권, 권력층을 변호하며 몸집을 키워온 곳으로 알려진 데다. 이한 감독은 "김앤장을 특정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직업 윤리 관점으로 접근했다"며 "너무 부패한 법조인들이 많잖나. 그것에 대한 상징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에게 공감을 주려면 조금 더 지금 세계 공기와 맞닿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9년에 개봉하는 것이니 <증인>이 반드시 지금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으면 했고, 특히 법조인이면 그런 공기가 잘 전달될 것 같았다. 제 나이(1970년생)가 되면 공통으로 느끼는 그런 불합리함, 법이 잘못 판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불합리로 보이는 결과들이 누적이 됐던 것 같다. 마음에서 그걸 지울 수가 없더라.

매스 미디어 역시 너무 대립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지 어떤 특정인의 의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 미디어가 갈등을 조장한다는 느낌을 굉장히 받아왔다. 실제는 다른데 왜 부각시키지? 그래서 <증인>을 보시면서 잠깐이나마 조금 다른 시선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에선 물론 거기까지 표현은 안 했지만, 자기와 처지가 다른 사람을 생각해보게 된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가 조금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이한 증인 정우성 김향기 김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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