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포스터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포스터ⓒ (주)디스테이션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100미터를 11초 44라는 기록으로 주파하며 차세대 단거리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한 타치바나 아키라(고마츠 나나 분)는 지역 선수들의 동경을 받는 최고의 에이스였지만 갑작스러운 아킬레스건 파열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린다. 재활 훈련을 하며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린 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부상을 당한 뒤, 우연히 찾은 그 곳의 점장 콘도 마사미(오오이즈미 요 분)가 보여준 자상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가 결코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명확히 인지한 점장은 아키라가 트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설득하기 시작한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신작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마유즈키 준이 연재해 온 동명의 만화가 일본 현지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영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고교 2학년 소녀와 마흔 다섯 살의 중년의 남성, 무려 스물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는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원작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설정에 벌써부터 기가 막힐 법도 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볼 때 두 사람 사이의 로맨스가 이 작품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태어나 처음 느껴본 이성에 대한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주인공 아키라의 모습은 그녀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일 뿐, 애초에 일방적인 짝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보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린 이들이 서로의 처지를 보듬는 과정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주)디스테이션


02.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구조적 특성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작품들의 경우, 주인공이 처해있는 상황의 근원을 플롯 뒤로 감추어 놓은 채 그 시작점을 찾아 심리적 아픔을 극복시키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절망적인 현재의 상황과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 어떤 새로운 사건의 경험 및 조력자의 도움, 그리고 회피해왔던 과거와의 조우, 그것을 극복해내는 인물.

하지만 이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이 부상을 당하게 된 이유와 현재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그녀가 부상을 당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외부적 시련의 극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적 상황에 놓여 방황하던 주인공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유사한 해피 엔딩의 구조를 보이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든 바꾸어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것이다.

03.

그 과정에서 활용되는 것이 아키라가 새로운 환경으로 접하게 되는 레스토랑 가든의 점장 콘도라는 인물이며, 그는 단순히 부적절한 관계의 대상이 아닌 아키라라는 인물의 외부적 조력자로서 작용하게 된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그는 그녀의 세상이 무너진 후에 뒤이어 찾아온 새로운 세상과도 같은 대상이었으며,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운동 종목 가운데서도 기록 경기를 주 종목으로 하며 기록 단축에만 시선이 향해 있던 그녀의 좁은 세상이 멈추고 난 뒤에 그녀의 새로운 목표이자 따뜻함이 되어준 키다리 아저씨와도 같은 인물. 아키라가 과거에 느낄 수 없었던 이성의 상냥함을 처음 느낀 대상이 콘도이기도 하다.

문제는 한 대상에 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아키라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만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이며, 이것 또한 기록 단축이라는 단거리 달리기의 미션처럼 무조건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로 삼고 돌진해 버린다는 점이다. 물론 어린 소녀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적절한 관계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콘도의 우회적인 거절과 우려까지 소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해석하려한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애매한 지점으로 이끌어 간다. 물론 아키라의 연정을 처음부터 단호하게 내치지 못하는 콘도의 태도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마스코트 '무키히고'는 콘도 점장에 대한 그런 그녀의 마음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상징물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하는 미신과도 같은 장난감일 뿐이지만, 그 마스코트 하나를 얻고자 지하철역 앞의 가챠(Gatcha) 기계를 수도 없이 돌리는 아키라의 모습. 그녀의 상황과 같은 경험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말도 되지 않는 미신에까지 마음을 기대면서 자신의 설익은 외사랑을 어떻게든 완성시켜보려는 그 노력만큼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장면이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주)디스테이션


04.

이 작품에서 콘도 점장의 비중만큼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아키라의 성장에 그의 역할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는 인물이 또 하나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달리기를 시작해 온 오랜 친구 하루카(세이노 나나 분)다. 불의의 부상으로 트랙을 떠난 뒤로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소원해지기는 하지만, 하루카는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아키라의 삶을 멀리서 응원하고 지켜본다.

아키라가 콘도 점장을 좋아하게 되었음을 알고 난 뒤,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의 성정을 파악하려는 장면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특히 하루카가 아키라 앞에서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은 이 작품의 섬세함을 잘 드러낸다. 지역의 최고 기록을 수립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던 이의 불운한 부상 앞에서 여전히 트랙을 마음껏 뛸 수 있는 친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부상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마음을 닫아버린 스스로가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만 저절로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키라 본인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역할도 하루카의 몫이다. 부상 이후 그녀가 노력도 해보지 않고 두 번 다시 트랙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마음을 닫아버린 까닭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으로 가득한 그 마음을 외면하고자 했던 이유다.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며 콘도 점장은 물론, 과거 아키라의 트랙 기록을 넘보며 지역의 유망주로 성장하는 미즈키(야마모토 마이카 역)의 영향으로 인해 아키라는 다시 한번 자신의 꿈을 위해 일어서게 되는데, 그 시작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하루카인 것이다.

05.

거의 포기나 다름이 없었던 아키라의 트랙 복귀에 대한 다짐은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공감과 이해의 영역으로 인해 다시 생기게 된다. 바로 콘도 점장과의 공감대다. 앞선 설명으로 인해 콘도 점장과 아키라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언급한대로 그것은 기존의 구조를 타파해보고자 하는 감독의 시도, 그리고 그 시도를 위한 표면적인 활용에 불과하다.

이 작품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여버린 이들이 서로의 처지를 보듬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시 콘도라는 인물은 활용되고 있으며, 그 부분이야말로 콘도 점장이 아키라에게 미치는 핵심적 영향이다.

점장이 자신의 글에 갖고 있는 미련과 아키라가 트랙 위 자신의 모습에 대해 갖고 있는 미련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큰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점장이 아키라의 사랑이라는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일정 부분 마음을 열어두었던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서 설명한대로 하나의 감정으로 한정할 수 없는 지점의 문제다.

자신의 잃어버린 창작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그녀의 진심을 이용했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아키라의 무기력함을 보면서 그는 쉽게 그녀를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책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남자와 여전히 자신이 뛰던 트랙을 외면할 수 없는 여자.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각각 마음에 품고 있었던 미련을 떨쳐버리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점에서 그것이 사랑이었든 아니든 그 만남은 어떤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해낸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스틸 컷ⓒ (주)디스테이션


06.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의외의 속도감을 보여주면서도 인물의 심리를 일정 부분 이상 명확히 그려나가며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과장된 행동과 표정이 가끔은 진중한 면을 흐리기도 하지만, 스토리 상에서는 전체적으로 큰 문제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 작품이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10대 소녀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문제로 남는다. 학생의 발목에서부터 위로 훑고 올라가는 시선과 같은 부분들은 이 작품의 소재 중 하나가 단거리 육상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히 과했으며 그것이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는 김대웅 감독의 <레슬러>의 특정 장면에서 가영(이성경 분)이 소비되던 방식과 유사하다. 작품의 이런 시선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작품이 내용 상 추구하는 바와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유일한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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