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멜버른 세계 선수권대회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남자수영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목에 건 박태환의 등장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수영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체격의 한계 때문에 자유형에서는 아시아인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는 수영계의 오랜 편견을 한국의 10대 소년이 깨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수영계는 박태환을 시작으로 한국 수영의 본격적인 르네상스가 열릴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박태환의 올림픽 금메달 이후 11년이 지난 현재, '리틀 박태환'이라고 부를 만한 선수는 등장하지 않았다. 세계 무대는커녕 작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여자 200m 개인혼영에서 금메달을 따낸 김서영을 제외하면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수영 강국들과 적지 않은 수준 차이를 보였다.실제로 박태환은 작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출전한 모든 종목 1위(아시안게임은 미출전)를 차지했을 정도로 여전히 국내 자유형의 독보적인 일인자다.

수영이 박태환의 다음 세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암흑기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면 여자 골프는 '골프 여왕' 박세리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황금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박세리 키즈'를 보며 골프 선수의 꿈을 키운 '리틀 세리 키즈'들이 LPGA 투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도 LPGA 5년 연속 신인왕이라는 한국 여자골프의 위대한 역사에 도전하는 선수가 있다. KLPGA를 정복하고 LPGA 투어에 나서는 '핫식스' 이정은이 그 주인공이다.

프로 데뷔 2년 만에 6관왕에 등극한 KLPGA의 '핫식스'
 
한국여자골프는 1988년 고 구옥희가 스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후 박세리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LPGA 무대에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박세리는 1998년 첫 출전한 LPGA 메이저대회 U.S.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선보였던 '양말투혼'은 IMF 경제 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감동을 안겨줬다. 박세리는 통산 25승을 거두며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LPGA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박세리 이후 한국에는 본격적인 골프붐이 일어났고 신지애, 최나연, 박인비로 이어지는 '박세리 키즈'들이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LPGA를 호령했다. 이 중 신지애는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LPGA 세계 랭킹 1위에 등극했고 박인비는 역대 최연소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박인비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며 남녀골프 역사상 최초로 '골든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한국골프협회에 등록된 선수 중 이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6번째 선수라는 뜻으로 '이정은6'으로 불리는 이정은은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한 아버지에게 효도하기 위해 더 악착 같이 골프에 매달렸다. 주니어 시절 호심배 아마추어 선수권에서 2연패를 차지한 이정은은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고 2016년부터 KLPGA 투어에 합류했다.

하지만 '밥 먹고 공만 친' 프로 선수들과의 경쟁은 신인인 이정은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2016년은 무려 7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남달라' 박성현이 다승과 상금(13억3300만 원)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고선생' 고진영도 3승을 거두며 KLPGA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시즌이었다. 이정은은 2016년 무관에 그쳤지만 한 시즌 내내 꾸준한 성적으로 상금 24위에 오르며 KLPGA 신인왕에 등극했다.

2017년 롯데렌터카 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이정은은 2017년에만 무려 4개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2017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이정은은 그 해 11월에 열린 KLPGA시상식에서 대상, 상금왕, 평균 타수 1위, 다승왕, 인기상, 베스트플레이어 트로피까지 휩쓸며 6관왕에 등극했다. 투어 첫 시즌 1승도 올리지 못했던 유망주의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였다.

 LPGA 신인왕에 도전하는 Q스쿨 수석 졸업생 이정은
 
 이정은 선수

이정은 선수ⓒ KLPGA제공/연합뉴스

 
2017년 12월 대방건설 골프단과 3년 24억 원의 거액에 스폰서 계약을 맺은 이정은은 작년 2월 전지훈련 도중 초청 선수로 참가한 타이 LPGA의 싱아 이산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정은은 태국 대회 이후 한동안 승수를 추가하지 못했지만 메이저대회였던 9월 한화 클래식과 10월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정은은 작년 KLPGA 투어에서 단 10개 대회만 출전하고도 상금과 평균타수에서 1위에 올랐다.

2년 연속 KLPGA 상금왕에 오른 이정은은 LPGA 퀄리파잉 스쿨(Q스쿨)에 참가해 18언더파 558타를 기록하며 참가 선수 102명 중에서 1위에 올랐다. 사실 이정은의 Q스쿨 참가는 '경험'을 쌓기 위한 것일 뿐 LPGA 투어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그럼에도 LPGA 시드권 확보를 목표로 참가한 선수들 사이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KLPGA 잔류와 LPGA 진출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정은은 2019년부터 LPGA투어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한국 여자골프는 LPGA투어에서 위대한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다. 바로 2015년 김세영을 시작으로 2016년 전인지, 2017년 박성현, 2018년 고진영으로 이어지는 4년 연속 신인왕 수상이다. 세계에서 골프를 가장 잘 치는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LPGA투어에서 특정 국가의 선수들이 4년 동안 신인왕을 독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한국 선수들의 기량이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골프팬들은 올해 LPGA 신인왕 계보를 이을 선수로 KLPGA를 평정한 이정은과 Q스쿨에서 13위를 기록한 전 주니어 세계 랭킹 1위 전영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전영인은 LPGA데뷔전이었던 ISPS 한다 빅오픈에서 8오버파로 컷오프됐다. 이정은은 오는 14일부터 시작되는 호주여자오픈을 통해 풀타임 LPGA 선수로 데뷔한다. 이정은은 올해부터 많은 LPGA 선수들과 함께 했던 20년 경력의 베테랑 캐디 애덤 우드워드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이정은이 작년 11월 Q스쿨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LPGA투어 참가를 망설였던 이유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이정은을 KLPGA 최고의 여성골퍼로 키워낸 이정은의 부모님은 귀한 외동딸이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보다 더 큰 절심함을 가지고 있는 '효녀 골퍼' 이정은은 올 시즌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을 높이며 지금보다 더 자랑스런 딸이 되려 하고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