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나 축구처럼 아예 출발이 늦었던 일부 종목을 제외하면 구기종목의 국제 경쟁력은 전통적으로 남자보다 여성 스포츠가 더 높았다.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첫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차지했다. 여자핸드볼은 구기종목 첫 금메달(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최초의 구기종목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여자 하키 역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선전했다.

농구 역시 남자보다는 여자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훨씬 좋은 성적을 올렸다. 비록 당시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했지만 한국 여자농구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미국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달성했다. 한국은 정은순, 정선민, 전주원이 주축이 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4강에 진출했고 박정은, 변연하, 하은주, 최윤아 등이 활약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8강에 오르며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한국 여자농구의 올림픽 도전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맥이 끊어졌다. 한국은 정선민, 박정은 등 한국여자농구를 이끌었던 노장 선수들이 차례로 대표팀을 떠나면서 2012년 런던 올림픽과 2016년 리우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만큼은 12년 만의 본선 진출을 자신하고 있다. '여고생 국가대표'에서 여자농구의 '국보센터'로 떠오른 박지수(KB스타즈)가 있기 때문이다.

프로 입단 2년 만에 WKBL 지배하고 WNBA 지명 받은 '거물 신예'
 
 프로 입단 2년 만에 리그 최고 선수가 된 박지수는 작년 4월 WNBA에 드래프트됐다.

프로 입단 2년 만에 리그 최고 선수가 된 박지수는 작년 4월 WNBA에 드래프트됐다.ⓒ KB스타즈

 
1990년대 실업농구와 KBL 출범 초기 삼성전자와 서울 삼성 썬더스, 대구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던 2m의 장신센터 박상관(분당경영고 코치)을 기억하는 농구팬이 있을 것이다. 박상관은 삼성전자 시절 '방탄소년단급' 인기를 얻고 있던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센터 서장훈에게 심한 파울을 저질러 농구팬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던 선수로 유명하다(당시 서장훈은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가 두 달이나 입원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따라서 박상관의 딸 박지수가 여자농구의 유망주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도 농구팬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지수는 분당 경영고 1학년 시절부터 축복 받은 하드웨어와 남다른 농구센스를 앞세워 청소년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고3 때는 성인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리우 올림픽 예선에서 7득점10.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바운드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4.3%의 확률을 뚫고 KB에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박지수는 프로 첫 시즌 발등 부상으로 22경기 출전에 그쳤다. 하지만 10.41득점10.27리바운드2.77어시스트2.23블록슛을 기록하며 여유 있게 신인왕에 선정됐다. 그리고 박지수는 2017-2018 시즌 정규리그 전 경기에 출전해 14.23득점12.89리바운드3.29어시스트2.51블록슛을 기록했다. 챔프전에서는 최강 우리은행 위비에 패해 우승이 좌절됐지만 박지수의 활약은 챔프전에서도 한결 같았다.

박지수는 시즌이 끝난 후 WKBL 시상식에서도 리바운드상, 블록상(국내 선수 기준), 우수 수비선수상, 윤덕주상, 베스트5를 휩쓸며 5관왕을 차지했다. 비록 정규시즌 MVP는 박혜진에게 내줬지만 개인기록만 본다면 박지수가 MVP에 선정됐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활약이 뛰어났다. 그렇게 박지수는 프로 입단 2년 만에 여자프로농구 무대에서 대체 불가능한 최고의 빅맨으로 자리 잡았다.

박지수는 프로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마친 지난해 4월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뜻 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뉴욕에서 열린 2018년 W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2017 시즌 우승팀 미네소타 링스로부터 2라운드5순위(전체 17순위)로 지명을 받은 것이다(박지수는 지명 후 곧바로 라스베가스 에이시스로 트레이드됐다). 아직 만으로 20세가 채 되지 않은 한국의 센터 유망주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뛸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여자농구 최고의 유망주에서 대체불가 빅맨으로 성장한 박지수
 
 박지수는 올스타전에서 베스트 퍼포먼스상을 받을 만큼 WKBL을 대표하는 인기스타다.

박지수는 올스타전에서 베스트 퍼포먼스상을 받을 만큼 WKBL을 대표하는 인기스타다.ⓒ 한국여자농구연맹

 
다행히 소속팀 KB가 박지수의 WNBA 진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박지수는 정선민에 이어 역대 2번째로 WNBA에 진출한 한국 선수가 됐다. WKBL에서는 두 시즌 만에 리그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지만 역시 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들이 집결한 WNBA는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다. 박지수는 시범경기 활약을 통해 개막 12인 엔트리 안에 포함됐지만 시즌 대부분을 주전이 아닌 벤치 멤버로 활약했고 평균 출전시간도 13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린 박지수에게 WNBA라는 큰 무대는 매우 좋은 경험이 됐고 시즌을 거듭할수록 출전 시간을 늘려가면서 뜻 깊은 루키 시즌을 보냈다. 약 3개월에 걸친 WNBA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자카르타로 날아와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박지수는 남북 단일팀의 기둥으로 활약하며 은메달을 이끌었다. 박지수가 없었던 조별리그 경기에서 대만에 덜미를 잡히며 고전했던 단일팀은 박지수가 가세한 후 골밑에서 한층 안정을 찾았다.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원소속팀 KB에 합류한 박지수는 이번 시즌 12.72득점11.8리바운드3.2어시스트1.96블록슛의 뛰어난 활약으로 KB의 1위 질주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11월 11일 OK저축은행 읏샷전에서는 WKBL 역대 최연소(만 19세11개월) 트리플 더블을 작성하기도 했다. 박지수가 골밑에서 버티고 있으면 WNBA 출신의 외국인 선수들도 페인트존 안으로 자신 있게 들어오지 못한다.

사실 박지수는 내외곽에서 자유자재로 득점을 올리고 어지간한 가드 못지않은 돌파력을 갖춘 정은순이나 정선민 같은 레전드 센터들에 비하면 플레이 스타일이 단순한 편이다. 하지만 골밑에서의 존재감 만큼은 '거탑'으로 불리던 202cm의 하은주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2명 이상의 수비가 붙었을 때 비어 있는 동료를 찾는 시야와 패스도 점점 발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박지수는 아직 미래가 창창한 만 20세의 유망주에 불과하다.

한국여자농구연맹은 지난해 아시안게임을 통해 가능성을 보였던 남북 단일팀을 내년 도쿄 올림픽까지 이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북한의 에이스 로숙영이 박지수와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춘다면 한국은 아시아 예선과 도쿄 올림픽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3년 전 언니들을 따라 올림픽 예선에 참가했던 17세 여고생 선수가 어느덧 한국 여자농구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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