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영화 <말모이> 중 한 장면.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 더 램프


"언어는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입니다."
 
위의 교훈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조선 전역에 흩어진 우리말을 한 데 모아 하나(표준어)로 정립하기 위해 앞장선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민초들의 뜨거운 저항정신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 속 되살아난 풍경을 통해 일본어가 강제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서울말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사투리들이 멋들어지게 빛난다.
 
통일된 표준어를 제정하고, 각 지역의 사투리를 모아 우리말을 집대성한 '조선말 큰사전'을 내겠다는 조선어학회의 시도를 일제가 가로막는다. 몇 년 동안 비밀리에 애써 모은 귀중한 우리말 자료들은 무단으로 들이닥친 일제 경찰이 강제로 압수한다. 연행된 한 동지는 모진 고문 끝에 숨진다. 어찌할 바 모르는 학회 회원들 앞에 길거리를 분방하게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경성(서울)으로 올라와 생활하는 조선8도의 사람들이 문당책방에 가득 모여든다. '고추장'을 말해달라는 주인공이자 조선어학회 대표인 류정환의 요청에 저마다 다르게 쏟아지는 말. "강추장, 고처장, 꼬이장, 땡초장, 꼬치장" 일일이 받아 적으며 기쁜 낯빛을 뿜어내는 조선어학회 동지들의 모습. 조상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정겹고 뭉클하기 그지없다.
 
평안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경기도, 제주도... 등 일본어 특유의 억양이, 일본식 언어습관이 전혀 배이지 않은 풋내 나고 구수한 우리말들이 반갑게 들려온다. 풀뿌리 민중, 순박하면서도 당찬 조상들의 활기어린 우리말이 참 값지다.
 
남녘과 북녘 해외의 8천만 겨레가 함께 누리는 민족의 명절 설도 가까워져서, 영화 속 장면들이 더더욱 묵직하게 와 닿는다. 주인공인 류정환 조선어학회 대표가 그 특유의 진지하고 나긋한 어법으로 내 마음 속에 '훅'하고 다가왔다.
 
"후손 여러분은 우리말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나요?"라는 물음. 민망하지만 "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말모이를 체험한 여러분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당장 영화를 보고 나오는 새벽길 머릿속에선 각축전이 마구 벌어졌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2(투·TWO)D' 영화표를 구입하곤 새해맞이 '이벤트'로 '팝콘'과 '콜라'를 먹다니... 큰 자괴감이 들었다. 영화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주변은 우리말 습관을 해치는 풍경들로 그득하다. 영단어를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며 어느새 부턴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 우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해법이 절실하다.
 
일단, 나는 내 주변의 일상부터 곰곰이 점검해보기로 했다.
 
손톱깎이가 전라도말 '쓸매길'이 된 사연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쓸매길이 어디 있지?"
 
전라남도 화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1957년생 우리 아버지가 서랍을 뒤지며 종종 꺼내시는 말이다. '쓸매길'은 사투리가 아닌 기묘한 '변형어'다. 인터넷에 이리저리 검색해 봐도 쓸매길의 유래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어를 꽤 오랫동안 보고 들어온 나는 쓸매길의 정체를 알고 있다.
 
쓸매길은 바로 손톱깎이다. 일본어로 손톱깎이를 '츠(정확히는 우리말에는 없는 츠와 쓰의 중간발음)메키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발음이 변화된 듯하다. 아마도 우리말 특유의 된소리 강세와 센 발음이 더해져 쓸매길이란 단어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일상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빵꾸'. "에이 또 양말(아니면 타이어)에 빵꾸 났네"할 때 자주 쓰는 그 말 맞다.
 
빵꾸는 영어에서 일본어로, 다시 한국식 은어로 2차 변화를 겪었다. 영국식 발음으로 펑크쳐(puncture)로 발음하는 영단어에는 '구멍'이라는 뜻이 있다. 이게 일본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팡쿠로 굳어졌고 구한말 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들어와 '빵꾸'라는 발음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70년 넘은 세월이 흘렀건만, 일상 속 언어습관에 일제의 '때'가 군데군데 묻어있다. 주유소에 들러 "만땅이요" 하면 당연한 듯이 기름을 한 가득 채워주는 직원들의 모습은 눈앞의 현실이다. '만땅'은 가득찰만(滿)에 영어 영단어 탱크(Tank)의 일본어 발음 탕크의 앞 글자를 더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니 우리식으로 제대로 풀이하자면 "기름통에 기름 한가득 넣어주세요"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워낙 익숙해서인지 우리말 표현이 다소 낯간지럽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슬그머니 들어온 외래표현이 지속해서 우리 마음을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가 유행어처럼 사용하는 '오~ 멋진데 엄청 느낌 있다'는 신조어인 '간지 나네'도 일본어 칸지(感じ·느낌이란 뜻)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일제에 의해 우리말을 마음껏 사용하지 못했던 옛 시절을 경계하지 않는 무감각에 입맛이 쓰다.
 
'쓸매길'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됐지만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파된 '간지 나네'는 전국에서 통용되고 있다. 해방 이후 사라졌어야 할 일본식 정서가 아직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고 따갑게 지적받아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지금이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정체불명-국적불명의 일본어, 영어식 표현을 마구 섞어 쓰는 우리,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우리 얼 지킴이' 일제강점기 말모이, 21세기 조선학교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영화 <말모이>의 스틸컷ⓒ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를 보면서 특히 씁쓸했던 장면은 일부러 우리말을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생존을 위해 일본어를 익히는' 선택을 한 학생 김덕진이 계속 눈에 밟혔다.
 
"우루사이 하야쿠 네로!(시끄러워 빨리 자)"
 
어느 으슥한 밤. 경성제일중학교에 다니는 김덕진은 아버지 판수와 큰소리 내며 우리말 공부를 하는 여동생 순희를 향해 버럭 외친다. 판수를 비롯해 조선인 가족 3명뿐인 단칸방 집에서조차 덕진의 말과 행동은 온통 '조선말을 하면 안돼'라는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런데 덕진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 교육기관이 있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는 영화의 경성제일중과 대비되는 민족학교, 조선학교가 있다. 주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일본에 정착한 분들의 후손들이 재학하고 있다. 일본사회의 차별을 이겨내며 기어코 우리말을 쓰겠다는 다짐을 한 동포학생들이다.
 
조선(朝鮮)학교는 이름대로 '조선민족의 가치를 배운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애초 조선학교의 출발점이 1945년 일제 패망 직후 조국 귀환을 앞둔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말 교육을 베풀기 위해 일본 곳곳에 설립된 국어강습소다. 조선학교의 또 다른 이름이 '우리학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수업 중 우리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무심결에 일본어 입말이 튀어나오면 지적받는다. 일본식 발음을 최대한 지양하고 받침이 많은 우리식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한다. 조선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면 '일본어 천지'인 일본사회에서 민족의 얼을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방도다.
 
나는 재작년, 일본에서 우연찮은 기회로 조선학교에 다닌 동포들과 실제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 딴에는 우리말에 익숙하지 않은 동포들을 배려한다며 익혀온 일본어로 운을 뗐는데 "우리말로 해 달라"는 확연한 답이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무척 배려 없는 행동이었다.
 
아베 정권과 일본 사법부는 "조선학교가 북한과 가까워 교육 의도가 불순하다"며 재정지원을 끊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일본 내 다른 외국계 학교에 비해 운영이 어렵다. 선생님들이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한 채 학생들을 교육하거나, 건물과 설비 등이 낙후했지만 미처 수리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하지만 '조선학교 차별 반대'를 내건 문부과학성(교육부) 앞에서의 금요행동 집회와 공연 등 학교를 지키기 위한 동포학생들의 주동적인 행동은 오늘도 내일도 이어진다. 비유하자면 내가 다녀온 그 곳에는 일제에 굽히지 않는 <말모이> 속 조상들의 투쟁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쩌면 한국의 우리들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나면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우리말에서 이따금씩 벗어나 쓸매길, 빵꾸, 간지를 쓰고 싶다는 유혹도 품을 수 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말모이>와 조선학교 동포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전쟁위기와 분단에서 남과 북, 해외의 겨레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2019년 현재. "언어는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확한 교훈을 8천만 온 겨레가 힘주어 되살릴 때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주권연구소>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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