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10대를 보낸 나는 '명절' 하면 무술영화였다. 이소룡이냐, 성룡이냐를 두고 짜장이냐, 짬뽕이냐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긴다.' 카더라 통신이 북한에서 날린 '삐라'처럼 떠돌아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이소룡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데 그때는 노란 점프수트 운동복을 입고 코를 툭 치며 '아뵹'을 외치는 상남자에게 반해 그가 세계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남자인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영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믿고 보는 배우는 역시 성룡이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드는 기분은 일단 돈이 안 아깝다. 순도 100프로 아날로그 액션. 손발이 착착 맞는 무술의 합을 보는 재미에다가 권선징악이 뚜렷해서 속이 시원하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억울한 심경을 대변하듯 악당을 무참히 응징해준다. 거기에 유머까지, 그래서 그의 영화는 단연 남녀노소 다모여 보기에는 최고다.

시계보다 더 중요한 액세서리였던 이쑤시개
  
 영화 <영웅본색> 포스터.

영화 <영웅본색> 포스터.ⓒ 조이앤시네마

 
이후 <영웅본색>이 나왔고 이 영화는 당시 영화계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영웅본색>은 국내에서 개봉관 한 개로 시작해서 점차 입소문을 타고 개봉관을 확장했다. 총 상영기간 무려 1년 6개월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당시 외삼촌이 광주에서 극장을 운영하셨는데 삼촌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거의 매일 가서 봤다. 나는야 극장 패밀리, 그래서 공짜. 홍콩 말이 한국말로 들릴 정도로 많이 봤다. 어딜 가나 거리에서 이 주제가가 흘러나왔고 주윤발은 모든 남자들의 따거(형님)가 되었다.
 
'이소룡이냐 성룡이냐'가 저물고 '주윤발이냐 장국영이냐'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는 곧 무술 영화의 시대는 끝이 나고 누아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 시절, 남성 호르몬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다들 입에 성냥개비나 이쑤시개를 물었다. 뾰족한 그것에 잇몸이 찔려 피가 나건 말건 이쑤시개는 시계보다 더 중요한 액세서리였다. 그리고 검은 트렌치코트와 보잉 선글라스. 시내에 나가면 남자들은 온통 다 검은 코트 열풍이었다. 요즘의 롱 패딩은 저리가라다. 머리에 무스를 발라 닭 벼슬처럼 높이 세우고 바닥이 쓸릴 정도로 긴 검은 코트에 성냥개비 정도는 입에 물어줘야 어디가도 꿀리지 않았다.
 
고이면 썩는다고 너도나도 트렌치코트에 권총 들고 의리를 강조하며 바닥에 피가 흥건한 장면들이 반복되다보니 곧 식상해졌다. 멀티플렉스 관들이 들어서고 한국영화들이 더 재미있어졌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와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하면서 더 이상 무술영화건 홍콩영화를 보지 않았다.

아이들을 웃다가 쓰러지게 만든 영화
  
 영화 <소림축구>의 포스터.

영화 <소림축구>의 포스터.ⓒ 시네마서비스/필름뱅크

 
시간은 흘러 몇 년 전, 식구들이 다 모여 바쁜 명절을 보내고 있는데 TV에서 특선영화를 했다. <소림축구>. 이름만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감이 오는 영화. 무술이 한물간 지 언젠데 저런 영화를 하나 싶었다. 나는 집안일을 하며 관심 없이 소리만 듣고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아이들 웃음소리가 났다. 웃음은 좀비보다 전염성이 강해서 듣고 있으면 일단 웃음이 난다.
 
잠시 후에는 어른들 웃음소리가 나더니 아이들은 쓰러졌다. 큰아이가 소리친다. "엄마 빨리 와서 같이 봐요, 엄청 재밌어." 역시 내 새끼. 남편보다 낫다. 남편은 평소에 유치한 건 딱 질색하며 고상을 떠시더니 웬일인지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웃음소리에 끌려 나도 옆에 앉았다.
 
<영웅본색>의 명장면인 주윤발이 나 홀로 복수하러 들어간 음식점 풍림각 문 앞에 문지기로 서 있다가 제일 먼저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바로 주성치다. 그 무명의 주성치가 16년이 지난 다음 만든 영화가 <소림축구>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독특한데 설정은 다소 극단적이다. 인간이 모두 홑겹이다. 한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쳐내고 단순화했다. 고뇌하고 내적 갈등 이런 거 없다. 복선도 없고 외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밌다.' 이 영화는 재미가 곧 의미다.
  
 영화 <소림축구>의 한 장면.

영화 <소림축구>의 한 장면.ⓒ 시네마서비스/필름뱅크

 
한때는 '황금다리'라 불리는 스타플레이어 명봉은 퇴물이 된 지 오래다. 소림사에서 무술을 연마하다가 사부가 죽는 바람에 백수신세가 된 씽씽(주성치)을 우연히 만난다. 씽씽은 강철다리를 가졌으며 공을 위로 한번 차면 한 시간 후에 공이 돌아올 정도의 힘을 가졌다. 명봉은 씽씽에게 축구팀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씽씽은 왕년에 소림사에서 무공을 같이 연마하던 사형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사형들은 무술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 보이는 비주얼을 가지고 있다. 뇌에 바이러스가 침범해서 계속 먹기만 하는 '뚱보'역의 막내부터, 머리로 못도 박을 '무쇠머리', 배에 공을 붙이고 뛰어다니는 '철갑복부', 비보잉을 하며 드리블을 하는 '발걸이 다리', 걸그룹 같은 몸을 가진 골키퍼 '번개 손'까지. 체형도 나이도 무술이나 축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팀을 만들어 슈퍼컵까지 출전하고 우승을 한다는 이야기다. 간단한 스토리인데 일화들이 반짝인다. 씽씽이 만두가게에서 만두를 공짜로 먹기 위해 만두가게 아가씨 '아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데,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이 악당들에게 사로잡혀 살기위해 불렀던 김정호의 '님'보다 한수 위다. 마이콜의 노래에는 소울이라도 있었지만 씽씽의 노래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그의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은 행인1은 이어 노래를 부르고 행인 2는 춤을 추고 결국 플래시몹으로 발전하는데 '어이없음이란 이런 것'을 보여주며 웃음은 덤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솔직한 한 줄 평
  
 영화 <소림축구>의 한 장면.

영화 <소림축구>의 한 장면.ⓒ 시네마서비스/필름뱅크

 
친선게임을 하러 나온 상대 팀의 바지에서 반칙할 때 쓰려고 숨겨온 몽키스패너와 망치가 떨어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자동차를 수리하다가 나왔다며 궁색한 변명을 하는데 또 다들 믿어주는 분위기다. 코미디 영화임에도 임산부나 비위가 약한 사람은 위험하다. 비위가 상하는 장면을 희화화한 신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식사 시간에는 시청을 피해야한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의 이 영화에 대한 솔직한 한 줄 평은 '골 때리는 영화'다. 근데 여럿이 같이 보면 그렇게 웃기고 재밌다. 신기한 건 혼자 보면 별루다. 옆에서 웃음소리 음성지원을 해줘야 그 맛이 사는 영화. 어이없어서 웃다가, 웃겨서 웃다가, 남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다보면 영화가 끝이 난다. 이런 영화는 킬링 타임용이 아니고 힐링 타임용이다. 일종의 웃음치료 같은 힐링 효과가 있다. 보고 나면 자꾸 생각나서 키득거리게 된다. 큰소리로 웃어도 된다. 그렇다고 유치한 사람 아니다. 고상한 사람들은 웃음도 꼭 비웃음처럼 웃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입 꼬리가 삐뚤어져 안 예쁘다.
 
명절에는 기름진 것 많이 먹어서 뱃살도 느는데 웃으면 살도 빠진다. 이번 명절, 운동 삼아 <소림축구> 한판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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