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여자배구의 역사는 김연경(엑자시바시)이라는 이름 석 자로 설명이 가능하다. 2006년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를 우승시키며 신인왕과 MVP를 석권한 김연경은 V리그에서 활약한 4년 동안 3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일본과 터키, 중국을 거치면서 가는 팀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중국은 정규리그 우승). 2011-2012 시즌에는 수준 높은 유럽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득점왕과 MVP를 싹쓸이했다.

한국 대표팀 내에서도 김연경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센터의 키를 가지고 리베로처럼 수비하고 외국인 선수처럼 공격하는 김연경은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의 '시작과 끝'이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4강과 2016년 리우 올림픽 8강,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같은 여자배구 영광의 순간엔 언제나 김연경이 중심에 있었다. 김연경은 한국이 동메달을 차지한 작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전체 득점 1위를 차지했다.

10년 넘게 한국 여자배구를 이끌었던 김연경도 어느덧 한국 나이로 32세의 노장 선수가 됐다. 오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이 김연경의 대표팀 마지막 무대가 될 전망이다. 김연경이 떠난 후 한국 여자배구를 이끌어 갈 다음 에이스는 누가 될까. 물론 100년에 한 번 나온다는 천재 선수의 빈 자리를 쉽게 메울 순 없을 테다. 그러나 현재 V리그에서 '포스트 김연경 시대'를 이끌 선수를 꼽자면 역시 흥국생명의 '핑크 폭격기' 이재영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여우' 박미희 감독의 지도 속에 공수 겸장 레프트로 성장
 
 박미희 감독은 수비에 부담을 느끼던 신인 시절부터 이재영에게 "리시브는 네 운명"이라는 말을 계속 강조했다.

박미희 감독은 수비에 부담을 느끼던 신인 시절부터 이재영에게 "리시브는 네 운명"이라는 말을 계속 강조했다.ⓒ 한국배구연맹

 
배구 경기에서 높은 점프를 하는 주 공격수들의 체력 부담은 '세금'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많은 지도자들은 팀의 에이스에게 수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실제로 과거 남자부에서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활약했던 가빈 슈미트(전 삼성화재)나 로버트 랜디 시몬(전 OK저축은행), 그리고 현재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의 주공격수 박정아는 공격에 전념하기 위해 서브 리시브를 면제 받았다.

고교 시절에 이미 성인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던 이재영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재영이 다니던 시절 선명여고에는 이재영 외에도 세터 이다영(현대건설 힐스테이트), 공격수 하혜진(도로공사), 센터 변지수(IBK기업은행 알토스) 같은 유망주들이 즐비한 '고교 올스타' 팀이었다. 하지만 2014-2015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1순위로 흥국생명에 지명된 후 이재영의 플레이스타일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외국인 선수가 공격을 주도하는 V리그의 특성상 국내 윙스파이커가 서브 리시브와 수비를 소홀히 한다면 그 팀은 결코 강해질 수 없다. 이재영은 현역 시절 공수에서 탁월한 기량을 뽐냈던 박미희 감독의 집중 지도 속에 리시브 훈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아무리 특급 유망주라도 단숨에 리시브가 좋아질 수는 없는 노릇. 이재영은 뛰어난 공격으로 여유 있게 신인왕에 선정됐으면서도 상대의 집중적인 목적타 서브를 받아내며 혹독한 루키 시즌을 보냈다.

이재영은 2015-2016 시즌 '2년 차 징크스'의 우려를 날려 버리고 득점 7위, 공격 성공률 9위, 서브 5위에 오르며 V리그 정상급 윙스파이커로 자리매김했다. 걱정했던 리시브 성공률도 43.7%까지 끌어 올리며 수준 높은 수비수로 성장했고 흥국생명은 2015-2016 시즌 정규리그 3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흥국생명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미아 예르코파와 한송이(KGC인삼공사), 김사니가 함께 뛰던 2010-2011시즌 이후 5년 만이었다.

흥국생명 입단 2년 만에 프로 적응을 완벽하게 마친 이재영은 2016-2017 시즌을 통해 V리그 여자부 최고의 선수로 인정 받았다. 득점 6위(479점, 국내선수 1위), 서브 8위(세트당 0.22개), 서브리시브 1위(세트당 3.86개)에 오르며 공수에서 맹활약한 이재영은 흥국생명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정규리그 MVP에 선정됐다. 바야흐로 V리그 여자부에 '핑크 폭격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탄력 앞세운 공격과 안정된 수비, 김연경의 유력한 파트너 후보
 
 현재 V리그 여자부에서 이재영만큼 공수를 겸비한 만능 공격수는 찾기 힘들다.

현재 V리그 여자부에서 이재영만큼 공수를 겸비한 만능 공격수는 찾기 힘들다.ⓒ 한국배구연맹

 
하지만 이재영에게 시련은 2017-2018 시즌 곧바로 찾아왔다. 최고의 시즌을 보낸 후 국가대표 차출거부 논란으로 배구팬들의 입방아에 오른 이재영은 김수지(기업은행)가 팀을 떠난 2017-2018 시즌 흥국생명이 1위에서 최하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지켜 봐야 했다. 이재영은 외국인 선수의 부상과 부진 속에 득점 5위(555점, 국내선수1위),리시브 2위(세트당 3.81개)에 오르며 고군분투했지만 팀의 추락을 막을 순 없었다. 

이재영은 시즌이 끝난 후에도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에 잇따라 출전하며 거의 전 경기를 풀타임 주전으로 뛰었다. 이재영이 대표팀에 차출된 사이 흥국생명은 FA 김세영과 김미연, 대형 외국인 선수 베레니카 톰시아, 거물 신인 이주아가 가세하며 전력을 크게 끌어 올렸다. 그런 흥국생명의 가장 큰 걱정은 입단 후 네 시즌 동안 쉼 없이 달려 온 '토종 에이스' 이재영의 체력과 부상 여부였다.

하지만 이재영은 2018-2019 시즌 정규리그 MVP에 선정됐던 2016-2017 시즌을 능가하는 활약을 펼치며 V리그 여자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톰시아와 김미연이 경기마다 다소 기복을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이재영의 한결 같은 활약은 흥국생명의 전력에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이재영은 최근 네 시즌 연속 40% 이상의 리시브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공격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안정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재영은 공격수로서 신장(178cm)은 다소 작지만 뛰어난 점프력과 빠른 스윙으로 신장의 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현재 대표팀 공격수 중 박정아(도로공사)는 수비, 이소영은 신장, 강소휘(이상 GS칼텍스 KIXX)는 기복, 정호영(선명여고)는 경험에서 단기간에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김연경의 레프트 공격수 파트너로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는 공수를 겸비한 이재영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한국배구협회는 지난 1월 25일 브라질리그 미나스 테니스 클럽을 이끌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을 영입했다. 그만큼 김연경의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 한국배구의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도쿄 올림픽의 출발점이 될 대륙간 예선전과 아시아 예선이 열리는 올해, 이재영이 국제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포스트 김연경 시대'를 이끌 여자배구의 새 주역으로 확실히 인정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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