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포스터.

<킹덤> 포스터. ⓒ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좀비와 보수파에 맞서 조선왕조를 지키는 왕세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자 이창(주지훈 분)은 영의정 조학주(류승룡 분)의 계략에 말려 역모죄인으로 전락한 뒤 경상도를 무대로 왕실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양에 있는 부왕이 이미 죽은 상태이므로 그대로 두면 조학주 천하가 될 게 명확한 상황에서 세자 이창은 힘겹고도 용감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킹덤> 속 세자는 두 가지 면에서 일반적인 세자들과 다르다. 첫째, 개혁 성향을 노출하며 보수파에 맞서고 있다. 둘째, 위급한 상황에서 왕실을 회복하고자 사활을 걸고 있다. 대부분의 실제 세자들이 임금이 되기 전까지는 후계자 수업에 전념하며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은 것과 달리, 드라마 속의 세자는 개혁과 왕실 회복이라는 목표를 눈에 띄게 표방하고 있다.
 
'킹덤' 이창처럼, 남다른 성향 표출한 세자들

드라마 속의 세자처럼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남다른 성향을 표출한 세자들이 있었다. 위의 첫째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1735~1762년)와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년)를 들 수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 때인 1749년부터 13년간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다. 이 기간의 사도세자는 '작은 조정' 혹은 '작은 임금'을 뜻하는 소조(小朝)로 불리면서 임금을 대리해 국정 전반을 총괄했다.
 
이 기간에 사도세자는 뚜렷한 개혁 성향을 표출했다. <킹덤> 속의 세자 이창이 기회 있을 때마다 "난 저들과 다를 것"이라며 친(親)백성 개혁 성향을 보이는 것처럼, 사도세자는 보수파인 노론당에 대한 거부감을 명확히 표출했다.
 
효명세자가 살았던 시기는 정권이 왕실 수중에 있지도 않고 당파 수중에 있지도 않은 시절이었다. 왕실 외척(사돈)이란 지위를 활용해 권력을 독점한 세도 가문들의 수중에 있을 때였다. 그 유명한 세도 정치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효명세자의 생존 시기는 세도 권력이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순조의 처갓집에서 효명세자의 처갓집으로 권력이 기울던 때였던 것이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한 마지막 3년을 제외하고 그 이전까지는 안동 김씨가 정권을 운영했다. 그래서 길지 않은 인생이기는 하지만, 효명세자가 21년 인생을 살면서 주로 접한 세도 가문은 안동 김씨였다.
 
효명세자의 꿈은 세도 가문으로부터 벗어난, 강력한 왕실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역점을 들인 것은 조정 내에서 안동 김씨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왕실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대표적 인물은 훗날 개화파 지성인으로 유명해지게 될 박규수(1807~1876년)였다.
 
개혁 성향 보인 세자들의 순탄치 않았던 삶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 KBS

  
그런데 즉위 전에 개혁 성향을 표출한 세자들은 삶이 순탄치 않은 게 일반적이었다. 보수파이자 다수파에게 밉보인 이들은 수명부터가 짧은 경우가 많았다. 사도세자는 27세 때 세상을 떠났고, 효명세자는 21세 때 세상을 떠났다.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도 못한 채 젊은 생들을 마감했던 것이다.
 
최고지도자한테 권한을 넘겨받고도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이 세자들과 대비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보다 불리한 처지에서 임금의 위임을 받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한 개혁 성과를 낸 사람들이다. 그중 하나는 중종 때의 조광조(1482~1519년)다.
 
중종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꾸릴 당시, 조광조는 34세의 2년차 신진 관료였다. 대리청정하는 세자는 물론이고 일반 세자보다도 못한 상태에서 막중한 책임을 떠안았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보수파인 훈구파에 대한 공략에 중점을 기울였다. 임금보다 강력했던 훈구파를 일소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임금이 훈구파를 다룰 수 있도록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구세력을 상당 정도로 약화시켜 놓았던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신돈(?~1371년)이다. 고려왕조 막판에 등장해 공민왕의 위임을 받아 개혁을 수행한 승려 신돈은 보수파인 권문세족을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전까지 그는 무명의 승려였다. 불교 내에서도 힘이 없었다.
 
그런 승려가 공민왕의 위임을 받아 권문세족 상당수를 숙청했다. 덕분에 신진세력인 유학자들이 공민왕 때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을 이룰 수 있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근간을 흔들어놓아 왕조 교체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신돈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인물이다.
 
사도세자·효명세자 및 신돈·조광조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개혁적인 세자들은 개혁적인 일반 신하들보다 성과가 적었다. 세자 신분으로 개혁에 성공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아버지로부터 대리청정 권한을 부여받는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리청정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세자가 개혁 성향까지 드러내면, 사도세자처럼 오히려 불행하게 될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었다.
 
세자들은 보수파 대신들에게 속속들이 파악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보수파에게 예측불허의 공격을 가하기 힘들었다. 또 세자들은 어려서부터 궁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신돈이나 조광조처럼 과감성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 자기 자신이 기득권층인데다가 차기 왕권이 예약된 몸이기 때문에, 왕실의 명운을 건 모험을 시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인해 개혁적 세자들은 정치 성향만 노출한 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위에서, <킹덤> 속의 세자가 일반 세자들과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고 했다. 그중 두 번째는, 위기시에 왕실을 사수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세자들은 개혁을 추진하는 면에서는 일반 신하들보다 실적이 떨어지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왕실을 위해 사활을 거는 면에서는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왕실이 자기 것이므로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면에서는 신돈이나 조광조 같은 신하들보다 훨씬 나았다. 

왕실을 지키기 위해 애쓴, 세자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리얼라이즈 픽처스

   
그에 관한 적절한 사례는 광해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17세였던 광해군은 분조(分朝, 미니 조정)를 이끌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을 지휘했다. 관군의 전력이 크게 훼손된 뒤였기 때문에 그는 백성들을 독려해 의병 투쟁을 유도하는 쪽으로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이 성공한 것에 더해 명나라군까지 참전하면서, 전쟁 분위기가 바뀌어 일본군을 남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보여준 광해군의 성공은 그 자신의 능력과 의욕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왕실이 위급할 때 세자들이 얼마나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세자라는 지위가 광해군을 그렇게 만든 측면이 컸던 것이다.
 
경우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병자호란 직후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대단한 희생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왕실을 지키기 위해 1637년부터 8년간이나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감내했다. 물론 인질이 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조선은 청나라의 압박을 덜 받을 수 있었다.
 
왕조가 위기에 처하면, 신하들 중에는 새 왕조를 꿈꾸는 이들이 생기기 쉬웠다. 하지만 세자들은 아버지 자리를 빼앗는 일은 할 수 있어도 왕조 자체를 무너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급박한 상황에서 임금을 대신해 왕조를 수호하는 일에서만큼은 세자들을 따라잡을 적임자가 없었다. <킹덤>의 세자 이창은 나라를 개혁하는 것과 나라를 수호하는 것 두 가지 적극성을 보이고 있지만, 실제의 세자들이 두각을 보인 것은 이 중에서 후자 쪽이었다.
킹덤 사도세자 효명세자 광해군 소현세자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