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부터 캐나다 밴쿠버에 머물러왔으니 정확하게 1년 반 만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던, 밴쿠버에서의 일상을 마감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마음은 참 복잡했다. 아쉬움과 후련함, 기대감과 두려움. 아마도 여기까지는 나와 동반한 남편과 아이도 함께 느끼는 감정이었으리라. 하지만 난 여기에 또 다른 묵직한 감정이 더해졌다. 바로 도착하자마자 시댁에서 지내야 한다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캐나다에서의 삶은 일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변화시켰다. 밴쿠버에서 참여했던 여성 리더십 워크숍은 결혼 후 쌓인 내 안의 분노와 억울함의 원인이 시댁중심 가부장제에 있음을 깨닫게 했고, 캐나다인들의 비교적 평등한 가정문화는 일상에서 변화를 실천할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나의 독박 돌봄노동 탈출기'를 통해 고백했듯, 캐나다에서 나와 남편은 가부장적 가족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갔다.

그런데 1년 반 만에 귀국해 첫날부터 보름 가까이 지내야 할 곳은 시댁이었다. 원래 살던 집이 공사 중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시차 적응도 되기 전에 시댁살이를 한다는 건 부담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한국형 가부장문화가 마음껏 발산되는 설 명절도 코앞이었다.

예전처럼 가부장적 문화에 순종하며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시댁에서 가부장제에 반기를 들 용기도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도 고민은 계속됐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두통까지 생기는 듯해 '닥치는 대로 하자'라고 반쯤 포기하며 기내 영화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런 고민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기내 영화 목록 중 유독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새 나는 이 영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개인보다 가족이 우선이어야 하는 동양의 여성
  
 레이첼과 닉은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대가족 문화를 따르는 닉의 가족에게 똑똑한 전문직 여성 레이첼은 가정을 위해 희생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로 비칠 뿐이다.

레이첼과 닉은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대가족 문화를 따르는 닉의 가족에게 똑똑한 전문직 여성 레이첼은 가정을 위해 희생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로 비칠 뿐이다.ⓒ 워너브라더스 픽처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뉴욕의 잘나가는 경제학 교수 레이첼(콘스탄스 우)은 남자친구 닉(헨리 골딩)의 '절친' 콜린(크리스 팡)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닉의 가족들이 사는 싱가포르를 방문한다. 싱가포르 행 비행기에 올라 갑작스레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이 퍼스트 클래스로 바뀐 후에야 레이첼은 닉의 가족이 싱가포르의 유명한 재벌임을 알게 된다. 마침내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 레이첼은 한 개인으로의 정체감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 더욱 가치를 두는 동양문화의 진수를 경험한다.

특히,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양자경)는 가부장문화가 강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때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캠브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한 재원이었던 엘레노어는 똑똑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시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 결혼 후 오롯이 가정에만 헌신한다.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며 따르고, 늘 일이 더 중요한 남편을 내조하며 아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키워낸다.

그녀는 불편함을 애써 감추며 함께 만두를 빚는 레이첼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우린 개인의 꿈보다는 가족을 우선시 하거든요"라고. 이후 마음이 상한 레이첼을 쫓아가서는 '희생'을 강조하고는 "어서가죠. 닉이 걱정하면 안 되니까요"라며 아들의 마음만을 살핀다. 레이첼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 보다는 가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이런 태도에 심한 불편감을 느낀다.

바로 이거였다. 환영하는 듯 대해주지만,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된,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로만 보는 시각. 내가 시댁에 갈 때마다 마음이 무거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혼 초기, 설에 세배를 드릴 때마다 시아버지께서는 "너는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행복하다"고 덕담을 하셨다. 이 말은 '시월드'에서 나의 위치를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

시댁에서 나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집안 행사 때 일을 거드는 존재일 뿐이었다. 내가 하는 일과 나의 꿈, 나의 정체감은 그 곳엔 없었다.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감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늘 웃으며 대해주시고, 잔소리 한 번 안 하시는 시댁 어른들 앞에서도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했다. 

내가 나를 존중해줄 때 생긴 변화
 
 닉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레이첼과 인사를 나누며 평가하는 장면

닉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레이첼과 인사를 나누며 평가하는 장면ⓒ 워너브라더스 픽처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이 대목에서 레이첼에게 딱 감정이입이 된 나는 더 이상 두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레이첼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가는지 점점 더 몰입해갔다. 레이첼의 첫 반응은 분노와 회피였다. 자신을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기는 커녕, 지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거라 깎아 내리며 평가하는 시선에서 레이첼은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학동창인 친구 펙린고(아콰피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예비 시어머니에게 귀염 받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으로 존중받는 게 중요한 거야. 경제학을 가르치는 세련된 교수. 그걸 보여주란 말이야"라고.

이 말에 레이첼은 용기를 낸다. 그리고 콜린의 결혼식에 당당하게 참석한다. 이 곳에서 레이첼은 시월드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 자신으로 행동한다. 여전히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들에게 "길 좀 비켜주세요"라고 말하고, 인탄공주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작정 시월드에 맞추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용기를 내는 모습에 닉은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닉의 가족들은 레이첼 뒷조사를 하고, 가족을 속였다며 그녀를 내친다. 아무리 용기 있고, 당당하게 자신을 대할 줄 아는 레이첼이라 할지라도 이런 모함 속에서 버텨낼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분노와 슬픔 속에서 버틴 레이첼은 결국 닉을 떠나 자기 자신을 선택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닉의 어머니와 만나 이렇게 말한다. "겁이 나거나 내가 부족해서 그를 떠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 닉을 사랑하지만, 그에게서 어머니를 빼앗고 싶지 않아요"라고. 자신은 물론,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권에서 자란 닉의 정체감까지 존중한 그녀의 선택은 기적처럼 예비 시어머니의 마음을 돌린다. 결국 둘은 축복 속에 하나가 된다.

시월드에서 '나'를 존중하기
 
 레이첼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을 변화시킨다.

레이첼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을 변화시킨다.ⓒ 워너브라더스 픽처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그렇다. 결국 어떤 관계에서든 나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 이것이 정답인 것이다. 레이첼이 시댁에서 인정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정체감을 지켜가기로 결심했을 때 변화는 시작됐다. 비록,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레이첼은 나 자신을 존중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사랑도 함께 지켜낼 수 있었다.

레이첼의 선택은 점점 더 한국에, 시댁에 가까워지고 있는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비행기 탑승 전부터 복잡했던 내 마음에 답을 주었다. '시댁에서 인정받으려고 애쓰지도,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스스로가 없어진 것 같다고 억울해하지도 말고, 어떤 경우든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는 선택과 행동을 하자. 레이첼처럼!'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곧 착륙을 준비하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원칙을 정하고 나자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몸과는 달리 마음은 훨씬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후 시댁에 머문 보름간 나는 레이첼의 "나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에요"라는 대사를 되뇌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존중해줬다. 시차 적응이 안 돼 머리가 아플 땐 솔직히 "두통 때문에 누워있겠다"고 말했고, 시어머니가 "들어가서 쉬어라"하시면 미안해하지 않고 얼른 방에 들어가 쉬고 책도 읽었다. 이삿짐 문제로 엄청 피곤했던 날 저녁 식사 후엔 설거지를 하는 대신 찜질방엘 다녀오기도 했다. 시아버지와 둘이 집을 지킨 날도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받아서 봤다.

예전 같으면, 시부모님께 잘해드리는 착한 며느리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에 엄두도 못 냈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내가 주방에서 내내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시부모님 말벗이 되어드리려 일부러 애쓰지 않았는데도 괜찮았다. 오히려 시부모님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나를 편안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시댁에서의 보름은 꽤 괜찮았고 내가 비로소 가족의 일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 설이다. 아마도 또 많은 한국의 기혼 여성들이 시댁에 방문해 노동을 제공하고,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숨막힘을 느낄 것이다. 나 역시 설이 다가오면 또 숨 한 번 크게 쉬고 시댁에 방문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안다. 나의 존엄은 시댁을 포함한 그 누구의 존중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존중해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말이다.

이번 설엔, 시댁에서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실천해보면 어떨까. 시댁에서 인정받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고 힘든 몸을 참아내기 보다는, 조금 솔직히 표현하고 힘들 땐 쉬어가며 나 스스로를 돌보는 걸 게을리 하지 말아보자. 어쩌면 스스로를 존중하는 이런 태도가 시댁 중심 가부장제의 결정판인 명절문화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이첼의 자기 존중이 그 무서운 시어머니를 변화시켰듯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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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로 세상을 관찰하며 살다,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가 존중받는 세상을 꿈꾸며, '생명감수성'과 '마음의 성장'을 일상과 문화콘텐츠를 통해 공유하고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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