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래의 미라이> 포스터.

영화 <미래의 미라이> 포스터.ⓒ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언제나 처음이 있다. 너무 익숙해서 숨 쉬듯 해내는 일조차 처음이었던 때가 있었다. 첫눈, 첫사랑, 첫 키스, 첫 여행, 돌아보면 세상은 온통 처음들로 가득하다. 그 처음들을 떠올릴 때면 삶이란 한없이 멋지고 짜릿한 무엇이 되곤 한다.

나는 내 삶에 있었던 몇 가지 처음을 기억한다. 처음 고양이를 만나 그 길고 뾰족한 눈동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온전히 한 생명을 받아들인 첫날도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매주 학교 앞을 찾아와 좌판을 벌이던 노인에게서 500원을 주고 샀었다. 한 달 넘는 시간이 흘러서까지 살아남은 흰 털 뽀송한 그 아이는 나의 자랑이며 기쁨이었다. 그러나 커진 몸집에 맞는 큰 집을 만들어주겠다고 덤벙거리다 그 아이를 밟아 죽였던 일은 내가 감당한 첫 절망이고 죽음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첫사랑을 만났다. 설레는 첫 데이트와 첫 키스를 지나, 그녀와 수많은 처음을 함께 나눴다. 하지만 많은 관계가 그렇듯, 그녀와 나 역시 어떤 처음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첫 번째 이별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타던 순간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아버지의 손이 자전거를 놓자마자 나는 비명과 환호가 절반씩 뒤섞인 소리를 지르며 쓰레기통 옆에 가서 처박혔다. 첫 질주였고 첫 충돌이었다.

처음 평론한 글이 매체에 실렸을 때, 기자가 되어 첫 기사를 썼을 때, 항해사가 되기 위해 첫 사표를 던졌을 때, 우여곡절 끝에 첫 항해에 나섰을 때, 먼바다 위에서 처음 고래를 보았을 때는 또 어떠했는가. 두렵고 짜릿하여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나는 가졌었다. 그 수많은 '처음'이 없었다면 나의 첫 번째 생은 무척이나 보잘것 없었으리라.

세상 모든 처음에 바치는 헌사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자 쿤은 그에게 커다란 질투를 느낀다. 아마도 동생을 가진 거의 모든 이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자 쿤은 그에게 커다란 질투를 느낀다. 아마도 동생을 가진 거의 모든 이들이 이러한 과정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미래의 미라이>는 처음에 대한 영화다. 네 살 난 쿤과 동생 미라이, 그 부모의 삶 어느 한순간을 베어내 그들이 제게 찾아온 처음을 대하는 순간을 살핀다. 영화는 그로부터 각자의 삶에서 처음과 대면하는 모든 이에게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난데없이 나타난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집을 떠나 모험을 하며 자전거를 배워가는 쿤의 일상과,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 부모의 이야기로부터 영화를 보는 많은 이들이 공감과 위로를 받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미래의 미라이> 역시 환상적 설정을 적극 반영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를 만난 앨리스처럼 주인공 쿤은 키우던 개의 인간형을 만나 환상의 세계로 돌입한다. 다짜고짜 들어선 그 세계에서 쿤은 중학생이 된 동생 미라이와 만나고,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의 바이크에 함께 타는 등 믿기 어려운 경험을 거듭한다.

영화는 미라이의 입을 통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색인(Index)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두꺼운 책 뒤쪽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색인은 지명이나 인명 등의 단어로 본문 가운데 해당 용어가 서술된 부분을 찾아내는 수단이다. 이를 통해 책을 읽는 사람은 원하는 부분만 찾아 읽을 수 있어 처음부터 내리읽는 것보다 효과적인 독서가 가능하다.

<미래의 미라이>의 구성도 그와 같다. 영화는 수차례에 걸쳐 다짜고짜 쿤과 쿤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삶 어느 한구석으로 돌입한다. 쿤 가문의 역사를 책 한 권으로 놓는다면, 색인을 통해 본문을 선별해 읽는 독서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다만 관객이 아닌 작가가 펼칠 페이지를 선택해 관객에게 내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화 내내 같은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 툭툭 끊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이 때문이다.

처음과 만난 당신, 멀리 보고 전진하라!
 
 쿨내 풀풀 나는 증조 할아버지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쿤(카미시라이시 모카 목소리).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쿨내 풀풀 나는 증조 할아버지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쿤(카미시라이시 모카 목소리).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호소다 마모루가 연속된 삶 가운데 특정한 순간을 발췌해 보여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에 의해 선택된 에피소드는 모두 처음이란 키워드로 꿰어지는데, 이것이야말로 호소다 마모루가 관객에게 보이고자 한 주제인 것이다.

처음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건 역시 쿤과 증조할아버지가 만나는 대목이다. 영화가 공들여 표현한 이 에피소드에서 쿤은 청년이던 증조 할아버지가 모는 말과 바이크를 그와 함께 탄다. 이때 쿤의 증조할아버지는 쿤에게 처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에게서 분출하는 멋짐 앞에 쿤은 크게 감동한다.

영화는 쿤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와 어머니, 증조부와 증조모의 삶 가운데서도 처음을 끄집어낸다. 새로 태어난 아이와 그 아이를 통해 변화한 환경은 쿤의 부모에게도 온전한 첫 경험이었음을 보이는 것이다. 생의 기로에서 악착같이 살고자 했던 증조부와 몸이 성치 않은 그를 선택한 증조모도 그 모든 순간을 처음 살았을 테다. 돌아보면 크고 작았던 그 처음들이 모여 쿤과 그 가족의 오늘을 이루었음을 영화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렇다. 세상 모든 것에는 처음이 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수많은 처음과 조우한다. 가끔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클 어떤 처음과의 대면에서, 어느 한 명쯤 '멀리 보고 나아가라'는 쿤의 증조할아버지의 조언을 기억해낸다면 <미래의 미라이>는 제 역할을 온전히 해낸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그 사실을 전해 듣는다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박수를 칠 것이 분명하다.
 
 제 삶에 들이닥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던 쿤(카미시라이시 모카 목소리)이 미래에서 온 미라이(쿠로키 하루 목소리)와 만나는 장면.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제 삶에 들이닥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던 쿤(카미시라이시 모카 목소리)이 미래에서 온 미라이(쿠로키 하루 목소리)와 만나는 장면. 영화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팟캐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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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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