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아모레스 페로스> 영화 포스터

<아모레스 페로스> 영화 포스터 ⓒ 미로비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2000년 <아모레스 페로스>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거칠고 강렬한 영상과 전혀 무관한 여러 인물을 하나의 우연한 사건으로 묶는 독특한 다중 플롯의 영화는 당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매우 급박하다. 차 뒷좌석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개를 살피랴 총을 들고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피해서 운전하랴 정신없는 남자의 긴박한 모습에서 관객은 조금 전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곧 누군가의 죽음을 볼 것 같은 긴장을 느낀다. 사고는 예정된 일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예상치 못한 피해자들을 만들고,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엮는 매듭이 된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미로비젼

 
아비규환의 교통사고 현장을 떠나 영화는 첫 번째 시퀀스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옥타비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좁은 집에서 엄마, 형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그는 형수 수잔나를 마음에 품고 있다. 낮에는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강도짓을 하는 형이 수잔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형수와 조카를 데리고 멀리 떠날 계획을 세운다. 새 출발을 할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반려견 코피를 투견 장에 내보내고, 순해 보이던 코피는 투견을 위해 사육된 개들을 상대로 전승을 거둔다. 수잔나의 마음 역시 자신을 향해 있으며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옥타비오는 조금의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코피에게 자신의 개를 잃고 벼르고 있던 동네 갱단 안드레 살가도는 코피의 몸통에 총알을 박는다. 거기에 이성을 잃은 옥타비오가 안드레 살가도의 옆구리를 칼로 찌른 것 까지가 첫 번째 시퀀스의 전 상황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미로비젼

 
교통사고 현장은 다시 반복된다. 충돌한 자동차 운전석, 피투성이가 된 한 여자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여자의 이름은 발레리아(고야 톨레도), 현재 멕시코에서 가장 잘 나가는 유명 모델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녀의 삶은 거침없이 전성기를 향해 달려간다. 일도 사랑도 모두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가정을 떠나기로 한 애인 다니엘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더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그녀가 탄 자동차는 충돌과 함께 우그러지고 그녀의 행복 역시 일그러진다. 

교통사고 현장엔 또한 목격자들이 있다. 엘 치보(에밀리오 에체바리아), 목격자 중 한 명으로 과거 공산주의 게릴라로 활동하다 감옥에 수감되고 출소 후에는 살인청부업자로 일하는 그는 쓰레기로 가득한 집에서 여러 마리의 떠돌이 개들이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신문을 읽던 그의 냉소 가득한 얼굴이 누군가의 부고 기사에 순간 눈물을 글썽인다. 숨어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이 슬퍼하는 젊은 여자(그녀는 엘 치보가 20년 동안 보지 못한, 아빠가 죽었다고 믿고 있는 엘 치보의 딸 마루다)에 머물고, 이후 그는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빈민가의 철없는 십대, 미모가 경쟁력인 모델, 삶에 회의를 느낀 킬러. 공통분모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이들에겐 그들 삶 속에 '개'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옥타비오에게는 코피가 발레리아에게는 리치, 엘 치보에게는 여러 마리의 떠돌이 개들이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미로비젼

 
투견장의 개들은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흥과 욕망을 위해 오직 물어뜯는 본능만이 남겨진 개들이다. 죽거나, 혹은 이겼어도 언젠가는 투견장에서 다른 개에게 목숨을 잃을 개들을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욕망의 도구로서 존재한다. 옥타비오에 코피는 그 이상의 존재이지만 그의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하면서 코피는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반면 리치는 그의 주인 발레리아처럼 완벽하게 관리된 모습으로 예쁜 악세사리 같은 존재다. 사고 후, 다리에 철심을 박고 퇴원한 발레리아는 다니엘의 보살핌으로 재활에 전념하지만 리치가 구멍 난 마룻바닥에 빠져 나오지 못하면서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지고 다니엘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바닥에 갇힌 리치를 구조하기 위해 뜯겨진 바닥은 마치 이들의 관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설상가상 발레리아는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고, 그녀는 자신의 집 창문으로 건물 벽면을 가득 채우던 광고 속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미로비젼

 
치보는 총에 맞아 맥박이 잦아들던 코피를 교통사고 현장에서 구조해 자신의 집에서 보살피고, 고피는 기적적으로 회복한다. 하지만 치보가 집을 비운 사이 투견으로 길들여져 있던 코피는 치보의 다른 개들을 모두 물어 죽이고, 투견으로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천진무구한 얼굴로 치보를 바라본다. 

철없는 옥타비오의 욕망은 돈을 모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떠나는 것이었으나 욕망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코피는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이었던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발레리아와 다니엘의 사랑은 불륜이었던 그들 관계의 시작을 시험이라도 하듯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균열하지만 마룻바닥에 갇혀있던 리치를 구해냄으로서 힘겨운 시간을 함께 견뎌내고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치보는 코피에게 총을 겨누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살인 의뢰)로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고피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딸 앞에 당당하게 서겠다는 결심으로 현재를 청산한 후 고피와 함께 떠나는 치보의 결연한 뒷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나고, 그들이 걸어가는 검은 땅, 삭막한 풍경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미로비젼

 
<아모레스 페로스>로 세계 여러 영화제 수상과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냐리투 감독은 바로 헐리우드로 건너가 <아모레스 페로스>를 쓴 각본가 기예르모 아리아가와 함께 < 21그램 >, <바벨>을 완성한다. 복잡한 다중 플롯(이는 기예르모 아리아가의 특기인 듯하다.)과 묵직한 주제의식은 이냐리투 감독의 힘이 넘치는 연출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다. 2010년 <비우티풀>에서부터 그는 각본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이전보다 플롯은 간결해지고 캐릭터의 개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상복을 타고난 감독이기도 하다. 2006년 <바벨>로 칸느 영화제 감독상 수상, 2015년엔 <버드맨>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받았으며(각본상과 촬영상등 주요 상을 모두 수상했다.), 다음 해인 2016년엔 <레버넌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로 2년 연속 감독상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헐리우드에서 멕시코 영화인들의 활약은 가히 인상적이다. 알폰소 쿠아론, 기예르모 델 토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이 세 감독의 우정은 함께 영화사 '차차차 필름'을 설립할 만큼 끈끈하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감독으로는 엠마누엘 루베키즈, 로드리고 프리에토까지. 이들의 작품은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는 걸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레버넌트>이후 이냐리투 감독의 차기작은 결정된 것이 없지만 그가 또 어떤 에너지 넘치는 영상과 이야기로 우리를 놀래 켜줄지, 그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그의 다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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