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는 '프로 취준생'이었다. 직장인들이 보고서를 쓰고 미팅 준비를 하듯,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 준비를 했다. 신문정리는 덤이다. 뉴스클리핑 업무를 맡은 어느 신입사원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신문을 읽었다. 서류전형과 필기시험, 실무평가와 최종면접 준비가 반복될수록 이 모든 과정이 마치 내 업무처럼 느껴졌다. '프로 뭐뭐러' 라는 말이 얼마나 진부하고 식상한 표현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취업준비라는 분야의 준(準) 프로급은 되지 않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지원자님의 우수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 취준생으로서의 성과를 묻는다면 낫 굿. 최종 전형까지는 이렇게 저렇게 올라갔는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취업준비가 힘든 이유는 단지 해야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여러 전형 중에 마주치는 거절들이 힘들었다. 한번은 인사 담당자가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스스로의 실력은 의심하지 말라고, 어차피 지금부터는 운의 문제이니 혹시나 떨어져도 너무 괘념치 말라고. 고맙지만 맘에 와 닿지는 않았다.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저기요, 운이 없어서든 실력이 없어서든 이유가 뭐든 간에 불합격 받으면 슬프거든요.

12월 중순, 그 해 마지막 결과를 기다리던 곳에서 최종 불합격 연락을 받았다. 이틀 걸러 잡힌 실무면접들과 이후에 또 며칠 간격으로 잡힌 최종면접들 때문에 혼이 쏙 빠졌던 12월이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으니 허무했다. 희망고문은 말 그대로 희망인 동시에 고문인지라 '이번엔 되려나보다' 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럼에도 맘껏 우울할 수 없는 게 취준생이다. 불합격의 아픔을 얼른 털어내고, 다른 회사의 서류접수와 필기시험을 준비해야했다. 답답함과 우울감이 뒤섞여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맺혔다. 청승떨기 대마왕답게 굳이 슬픈 노래를 찾아 들으며 버스 구석자리에서 조용히 울었다.
 
희망고문 속에서도 맘껏 우울할 수 없는 취준생 희망고문 속에서도 맘껏 우울할 수 없는 취준생

▲ 희망고문 속에서도 맘껏 우울할 수 없는 취준생 희망고문 속에서도 맘껏 우울할 수 없는 취준생 ⓒ 픽사베이

 
Don't carry the world upon your shoulders. For well you know that it's a fool who plays it cool. (이 세상을 네 어깨에 짊어지지 마. 아무렇지도 아닌 척 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란 걸 알잖아.)
그 때 자주 들은 노래 중 하나가 비틀즈의 '헤이 쥬드(Hey Jude)'다. 반주 없이 "헤이 쥬드"하고 시작하는 도입부가 마치 "저기, 있잖아"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1분이 지나는 지점에서 "이 세상을 네 어깨에 짊어지지 마(Don't carry the world upon your shoulders)"라는 가사가 귀에 꽂혔을 땐 수도꼭지를 튼 냥 눈물이 나왔다. 뭐야, 세상 다 무너진 느낌이었던 걸 어떻게 알고 이런 말을 해주는 거야. 섣부른 위로나 동정 받는 게 싫어서 잠수타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으면서 이런 노래를 듣고 위로받는 스스로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굴이 아니라 "힘들면 힘들다고 해"라고 말하면서 자기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헤이 쥬드'는 실제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쓰인 곡이다.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을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비틀즈의 인기가 절정을 달리던 때 존 레논은 행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바람이 났고, 결국 아내 신시아 레논과 이혼했다. 폴 매카트니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았을 줄리안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자신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상실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줄리안을 걱정하는 폴 매카트니의 마음은 노랫말에 고스란히 담겼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Hey Jude, don't make it bad), 고통스러우면 언제든지 그만 두라고(And anytime you feel the pain, hey Jude, refrain) 조곤조곤하게 다정한 말을 내뱉는다.

그런데 정작 줄리안 레논은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노래가 자신을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 쥬드'를 세상에서 가장 처음 들은 사람은 줄리안이 아니라 어느 마을 주민들이었다. 새로운 녹음 작업을 위해 런던으로 이동하던 폴 매카트니는 우연히 해롤드라는 마을에 들렀고, 그를 알아본 주민들은 영업 끝난 펍의 문을 열고 열렬히 환영했다. 그 따스한 환대에 화답하기 위해 폴 매카트니가 불러준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미발표곡이었던 '헤이 쥬드'는 이렇게 즉흥적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비틀즈 히트곡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노래치고는 참 '힘 빠지는' 발표다. 폴 매카트니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곡은 공개 방식까지도 "어깨에 힘 빼고 살라"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했다.
 
비틀즈 비틀즈

▲ 비틀즈 비틀즈 ⓒ 픽사베이

 
동굴 속에 있던 어느 날, 친구 H로부터 전화가 왔다. H는 평소에도 자신은 위로에 능하지 않다고 말해온 친구였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즐거운 이야기는 할 자신이 없었고, 우울한 근황을 이야기하다간 목이 멜 것 같았다.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고 멍울진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H는 "밥 꼭 먹고"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치, 힘을 내려면 밥부터 먹어야지. 그 날 저녁엔 밥알을 꼭꼭 씹어 먹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정말로 힘이 났다. 때때로 "힘내"라는 말 보다는 "힘 빼"라는 말이 더 큰 힘을 준다. "밥 꼭 먹어"라는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말이 나를 다시 책상 앞에 앉힌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 송고 후에 개인 브런치 계정(brunch.co.kr/@dandgy)에도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틀즈 록밴드 7080 취업준비생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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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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