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기자 말-
 
 영화 <폭력의 역사> 포스터

영화 <폭력의 역사> 포스터ⓒ 비로비전

 
'발견'을 하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 그 자체로의 발견이 될 수도 있고, 영화의 배경, 이야기, 감독, 배우, 음악 등등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각인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2005년 영화 <폭력의 역사>에서 우리는 비고 모텐슨이라는 배우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연기를 시작했고, 대작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아라곤을 연기하며 소위 유명세라는 것을 얻었지만 배우로서 그의 카리스마가 폭발한 것은 <폭력의 역사>에서다.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이웃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한 소시민이 알고 보니 과거엔 갱단의 전문 킬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목했던 가정이 위태로워지는 과정을 담은 영화는 '가족'과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비로비전

 
한 치의 그림자도 허용 않겠다는 듯 강렬한 햇살이 허름한 모텔을 비추고, 두 남자가 모텔에서 나온다. 나이차가 꽤 나 보이는, 가족도 친구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뿜어내는 차가운 기운이 심상치가 않다. 고요함은 이내 불안함으로 바뀌고 불안은 충격으로 이어진다. 공포에 떠는 어린 아이에게조차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에게 살인 행위는 너무도 쉬워서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첫 번째 시퀀스가 보여주는 폭력의 일상성, 그 어떤 윤리의식의 갈등도 없는 익숙함은 마치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선언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섬뜩한 도입부는 어린 소녀의 비명소리와 함께 미국의 한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으로 넘어간다. 악몽에서 깨어난 소녀에게 온 가족이 달려오고, 소녀는 가족의 사랑에 안정을 느끼며 다시 잠을 청한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넘치는 가정의 모습이다. 이들의 가장 톰(비고 모텐슨)은 모두가 모두를 알 만큼 작은 마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모범적인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배려 깊은 사장이자, 손님들에게는 친구 같은 주인인 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운영하는 소박하고 작은 식당에서 직원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그날의 장사를 마감한다. 그런데 첫 번째 시퀀스에서 보았던 두 남자, 돈이 필요하면 어디라도 들어가 총질을 일삼는 그들이 식당으로, 평온했던 톰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아니, 굳이 원하는 게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관객들의 불안과 식당 안 사람들의 공포를 해소시켜 주는 것은 순박하게만 보였던 톰의 폭력에 대응하는 놀라운 순발력이다.

권총을 가진 불한당들을 홀로 제압한 그의 완벽한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이 사건은 지역 뉴스를 장식하고, 그는 마을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들로 식당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그 속엔 누가 봐도 갱으로 보이는 한 남자와 그의 부하들도 있다.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비로비전

 
선글라스를 벗자 애꾸눈인 것이 드러난 남자는 자신을 칼 포카티(에드 해리스)라고 소개하며 톰을 조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철사 끈으로 자신을 애꾸로 만들고 잠적해버린 조이를 찾아 온 칼 포카티 일당은 톰의 부정에도 매일 톰과 그의 가족 주변을 맴돌며 톰을 위협하고, 처음에 톰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가족들의 믿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진다. 불한당들을 처치했던, 모두가 용기 있다고 칭찬했던 톰의 영웅적인 행동은 그가 조이 즉, 필라델피아 유명 갱단의 킬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확신을 준다. 신뢰와 사랑으로 단단했던 가족은 점점 와해되기 시작한다.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는 톰의 과거가 자신들의 현재를 위협한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경멸을 함께 느끼고, 그것은 고등학생인 아들 잭도 마찬가지다. 불량배들이 아무리 자극해도 싸움을 피했던 잭은 자신의 천성을 이제 막 발견한 사람처럼 불량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마치 '조이'의 아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을 혼쭐낸다.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비로비전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톰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해야만 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칼과 그의 부하들을 죽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자신의 형, 갱단의 리더가 된 리치(윌리엄 허트)를 찾아가 타협을 하려 하지만 리치는 조직 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죽이려 한다. 맨몸인 톰이 무장한 리치의 부하들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톰은 경탄스러운 감각으로 리치의 부하들을 하나둘씩 쓰러뜨리고 결국엔 형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폭력과 살인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결국 폭력으로 마무리 지은 톰은 리치의 대저택 안에 있는 호수에서 마치 자신의 죄를 씻어내듯 피 묻은 자신의 몸을 씻는다. 톰의 가족은 침묵 속에 돌아온 그를 맞이한다. 과연, 이들 가족은 예전의 웃음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폭력으로부터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은 결국 폭력밖에 없는 것일까?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비로비전

 
꽤 노골적인 제목의 <폭력의 역사>는 폭력이 인류의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없었던 행동이자 결과이며 하나의 폭력이 단지 또 다른 하나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다양한 폭력을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방어로서의 폭력일 때조차 마찬가지며, 한 번 시작된 이상 멈출 가능성은 없다.

과거의 톰, 그러니까 조이는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 등장했던 남자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던 사람이었다. 조이를 죽이고 톰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그의 말처럼, 조이와 톰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 남아 있는 조이의 모습은 그의 몸에 배어있는 살인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뿐이다.

누구에게나 '의외의 모습'은 있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전혀 다른 상황 혹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의외성'에서 그치게 마련이며, 한 사람이 여러 인격체를 가지지는 않는다. 톰은 어떤 사람인 걸까? 그가 보여주는 성격은 분명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다정한 남편이며 배려와 책임이 충만한 이웃이다. 반면 조이에게는 폭력이라는 행위가 있을 뿐, 캐릭터는 없다. 무엇이 그의 본성인지 단정 내릴 수 없지만 그의 의지가 '선'을 향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영화 <폭력의 역사>의 한 장면ⓒ 비로비전

 
톰의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 비고 모텐슨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이 영화 안에서 빛이 난다. 단지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을 만난 것이다. 이 작품 이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과 함께 한 <이스턴 프로미스>와 <데인져러스 메소드>에서의 작업은 그를 좀 더 개성 짙은 배우로 만들어 주었고, 그는 <반지의 제왕>이라는 거대한 산을 뛰어 넘었다.

그는 연기 외에도 그의 다양한 예술 활동(시, 그림, 사진)을 하고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덕분에 지난 몇 년간은 남미와 유럽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동안 그의 모습을 한국 극장에서 만나기 어려웠는데, 지난 9일 그가 출연한 <그린북>이 개봉을 했다. 그가 예전에 연기했던 어둡고 무거운 캐릭터들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그린북>에서 그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일 것이며, 낯설지만 반갑고, 역시 배우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보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