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 32주기를 하루 앞둔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추모제

박종철 열사 32주기를 하루 앞둔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추모제 ⓒ 성하훈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영화의 힘은 오래시간 굳게 닫혔던 철문을 열게 했고, 음습한 고문공간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던 역사의 현장은 수십 년이 흘러 희생자의 추도 행사가 열리는 자리로 변했다.
 
고 박종철 열사 기일을 하루 앞둔 13일 오후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돌아온 후 첫 행사인 데다, 그것이 박종철 열사의 추모제였기에 더 남달랐다.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돼 왔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은 지난해 12월 26일 열린 이관식 이후, 관리와 운영권한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넘어왔다. 1987년 들불처럼 일어났던 6월 항쟁의 시발점이었던 박종철 열사 고문살해 현장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는 것 자체가 매우 뜻 깊었다.
 
최광기씨의 사회로 진행된 박종철열사 32주기 추모제에는 고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씨를 비롯해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와 유가협과 민가협 회원들이 참석했고, 박종철의 선후배 동문들, 시민 학생들도 함께했다.
 
여론을 움직인 영화 <1987>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열사 32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영화 <1987> 장준환 감독과 김윤석 배우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열사 32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영화 <1987> 장준환 감독과 김윤석 배우 ⓒ 성하훈

 
올해 박종철열사추모제가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은 2017년 12월 개봉한 영화 <1987>의 역할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1987> 이후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시민사회에 돌려달라는 여론의 요구가 더욱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미 앞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랜시간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끊이없이 제기했다. 오랜 요구에도 꼼짝 않던 경찰은 <1987>이 개봉된 뒤 여론의 힘을 받은 시민사회의 요구가 더욱 거세지자 결국 이를 수용했다. 음험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가 민주주의의 교육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후 남영동 옛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탈바꿈시킬 예정이다.
 
이날 추모제에는 <1987>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과 김윤석 배우, 김경찬 시나리오 작가가 참석해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되새겼다. 영화가 상영중이던 지난해 1월 같은 날에는 <1987> 출연 배우 다수가 마석 박종철 열사의 묘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김세균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경찰이 떠나고 시민 품으로 돌아온 후 첫 추모제로서 의미"를 부여했다. 김 이사장은 "남영동 옛 대공분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운영되다가 노무현 정부 때 인권센터로 바뀌었고 영화 <1987> 개봉을 계기로 경찰이 물러나고 시민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며 "영화 <1987> 제작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장준환 감독과 김윤석 배우, 김경찬 작가는 따로 추모사를 전했는데, 이들을 소개하던 사회자 최광기씨는 "<1987>을 딸과 봤다. 영화가 끝난 후 함께 눈물을 흘렸다"라며 "영화를 통해서 과거의 기억해야 순간을 되찾았고, 우리사회가 나아갈 길을 영화가 전해줬다"라고 울먹이며 말하기도 했다.
 
"영화에 담지 못한 이야기 많아 죄송하다"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영화 <1987> 김윤석 배우, 장준환 감독, 김경찬 시나리오 작가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영화 <1987> 김윤석 배우, 장준환 감독, 김경찬 시나리오 작가 ⓒ 성하훈

 
추모사를 위해 나온 장준환 감독은 "사회자분이 눈물을 흘려서..."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마이크를 먼저 시나리오를 쓴 김경찬 작가에게 넘겼다. 장준환 감독은 추모사 중 감정이 올라오는 듯 종종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경찬 작가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 이곳에 왔었는데, 5층에서 현장을 지켜보면서 박종철 열사가 여전히 갇혀 계신 느낌을 받아 안타까웠다"며 "그 마음으로 글을 썼고 그 결과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영화가 잘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드디어 박종철 열사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든다"면서 "이 모두가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장준환 감독은 "재작년 여름 이 현장에 왔을 때, 5층에 이상하게 생긴 창문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그리움들 고통, 슬픔을 쌓아 놓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정말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가졌는데, 다행히 많은 분들 도움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이야기로, 기적적으로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1987>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드리고 싶었다"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후배들이나 다른 분들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매질을 당해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분들이) 꿈꾸었던, '같이 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김윤석 배우는 영화 제작 초기를 회상하면서 "이 영화가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며 "저를 비롯해서 너무 고마운 두 분, 하정우-강동원 배우와 함께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금을 모을 수 있겠다, 해서 감독님과 함께 시작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2017년 1월 부산에 박종철 열사의 형님과 누님을 찾아뵙고 '저희가 최선을 영화를 만들겠으니 지켜봐주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믿고 맡기겠다는 믿음을 주셨다"면서 "<1987>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이것이 하나의 불씨가 되고 생명력을 가지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제작과정의 이야기를 전했다.
 
김윤석 배우는 "(박종철 열사 가족들이) 영화를 보고 보내신 문자가 기억난다"며 "영화는 다큐가 아니기 때문에 픽션이 가미될 수밖에 없는데, 박종철 역을 맡았던 여진구 배우가 고문을 받으면서 '살려 주세요'라고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누님께서 단호하게 '내 동생 종철이는 절대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마음 잊지 않겠다"라며 추모사를 맺었다.
 
박종철 열사 선후배 영화인들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김세균 이사장이 영화 <1987>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13일 오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김세균 이사장이 영화 <1987>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성하훈


박종철기념사업회는 추모사가 끝난 후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감사패 문구는 박종철 열사의 형이 직접 썼는데, 영화를 통해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장준환 감독과 김윤석 배우는 추모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과 함께 박종철 열사가 고문당했던 5층으로 올라가 헌화했다. 이후  내려와서는 박종철기념사업회 관계자들 및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사진촬영에도 응해주며 자리를 지켰다.

영화계 인사들 역시 추모제 행사에 적극 참여했다. 추모공연을 한 평화의 나무 합창단에는 김영덕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가 함께했고 박종철합창단에 참여하고 있는 김범식 전 부산 영화의전당 영화처장은 추모제 마지막 순서인 '그날이 오면' 합창에 나서는 등 박종철 열사의 선후배 영화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지난겨울 혹한 추위 속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달라고 1인 시위를 벌였던 이안 피디와 김중기 배우 등도 이날 추모제에 참석해 박종철 열사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회상했다. 이안 피디는 "박종철 열사는 대학 때 학습을 지도한 선배였다"며 지난겨울 공들였던 활동이 결실을 맺은 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1987 남영동 대공분실 박종철 열사 장준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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