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기자 말-
 
 영화 <어톤먼트> 포스터

영화 <어톤먼트> 포스터ⓒ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우리는 때로, 아니 생각보다 자주,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해 쉽게 단정을 내린다. 오해는 오해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나비효과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인생을 파멸로 이르게 하기도 한다. 자신이 범한 오류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가다 스스로가 그 책임을 묻기 시작했을 때, 사소했던 오류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무겁게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과연 죄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상상력이 뛰어나고 남다른 감수성의 한 소녀가 있다. 위대한 작가를 꿈꾸는 소녀는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다. 소녀의 교만, 스스로에 대한 단호한 확신은 사실을 왜곡시킨다. 그에 대한 대가는 잔인하고도 가혹해서 속죄를 위해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야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만큼이나 괴로운 일일 것이지만 속죄의 행위가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속죄'라는 뜻의 <어톤먼트>는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독특한 플롯에 충격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물들의 사랑, 두려움, 욕망, 슬픔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바다처럼 나른하고 평온한, 숨결조차 반짝이는 1935년의 어느 여름, 탈리스 가문의 대저택은 앞으로 다가올 비극을 모르고 있다. 작가를 꿈꾸는 탈리스 가문의 막내딸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는 이제 막 자신의 희곡을 탈고하고 가족들 앞에서 연극을 펼쳐 보일 생각에 들떠있지만 연습은 않고 놀 궁리뿐인 사촌들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분수대 앞에서 금방이라도 고함을 지를 듯한 기세로 서 있는 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는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이 어린 브라이오니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로비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분수대 안에 들어가 깨어진 화분 조각을 꺼내 나오는 세실리아에게서 브라이오니는 분노와 수치심을 읽어내고, 이것이 자신의 첫 번째 오류라는 것을 열세 살의 브라이오니는 꿈에도 모르고 있다. 

두 사람의 신분 격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감정

영화는 브라이오니의 관점에서 한 번, 그리고 또 다른 관점에서 한 번 보여준다. 그녀가 놓친 진실을 같은 시간, 같은 사건을 반복해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 그렇다면 브라이오니가 창문을 통해서 본 장면의 진실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 온 로비와 세실리아는 소꿉 친구가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서로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또한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상류층과 가정부의 아들이라는 신분 차이가 무의식적으로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방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체를 모르기에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은 여름의 열기보다 뜨겁고 절실하고,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고 싶은 욕망의 억제는 쌀쌀맞음과 멋쩍음으로 표현된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탈리스 가문의 후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의대 진학을 앞두고 있는 로비는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다.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와 성공에 대한 야망이 아닌 단정함과 그 속에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품고 있는 그와 달리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앞으로의 진로가 불확실한 세실리아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음에도 권태로워 보인다. 여름이 끝나면 로비는 다시 떠날 테지만 세실리아는 대저택에 남을 것이다. 아무리 외면하려해도 외면할 수 없는 욕망이 서로 맞물리는 순간, 그것을 목격한 브라이오니의 눈에는 두 사람의 사랑의 행위가 로비의 일방적인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브라이오니가 단편적으로 수집한 (잘못된) 정보들은 로비를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세실리아를 그의 폭력의 피해자로 만들어버린다. 탈리스 가의 장남 리온이 재벌 친구 폴(베네딕트 컴버배치)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저녁, 쌍둥이 사촌들이 가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지는 동안 쌍둥이들의 누나, 롤라(주노 템플)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롤라는 가해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브라이오니는 어둠 속에서 로비의 얼굴을 봤다고 증언한다. 브라이오니의 확신에 찬 증언으로 로비는 강간범으로 체포된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시간이 흐르고, 브라이오니(로몰라 가레이)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간호사가 되어 독일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돌아온 군인들을 보살피며 틈틈이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족과 의절하고 역시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에게 '그 날'의 일을 사죄하기 위해 찾아간 그녀는 세실리아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로비를 만난다. 감옥과 전쟁터 중 후자를 선택하고 군인이 된 로비의 증오어린 눈길을 마주한 브라이오니는 언니와 로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돌아온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어릴 적 꿈꾸었던 작가가 된 브라이오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 평생을 써왔던 '그 날'에 대한 이야기. '죄'인 줄도 모르고 저질렀던 자신의 죄에 대한 고해이자 사실은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재회하지 못했던 가엾은 연인 세실리아와 로비의 사랑을 글 속에서나마 이어주고 싶었던 자신의 바람을 고백한다. 그녀는 (감히) 세실리아의 아파트에 찾아간 적이 없고, 그 날의 증언을 바꾸지도 않았다. 전쟁은 로비와 세실리아의 목숨, 그리고 사죄의 기회도 모두 앗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속죄의 기록이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완벽한 캐스팅

어린 소녀의 교만에서 시작된 비극을 완성한 것은 여기에 포함된 모두의 이해관계와 이기심이지만 우리는 우선 세실리아와 로비의 가슴 아픈 사랑, 눈부신 햇살처럼 빛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미래가 전쟁터의 재처럼 흩어져버린 그 비극에 집중하게 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브라이오니의 상상이지만) 처음으로 카페에서 재회를 했을 때의 떨림은 고스란히 관객의 가슴에 전달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집중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완벽한 캐스팅에 있을 것이다. 

특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제임스 맥어보이의 섬세한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자아내며 로비의 사랑을 더욱 간절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 반짝이는 햇살아래 눈부신 젊음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가슴 터질 듯한 입맞춤도,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며 '덩케르크'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순간도, 그가 등장하는 모든 순간이 가슴 아프다. 그는 아직 신인배우였지만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로비를 상상하지 못 할 만큼 외모에서부터 표정, 걸음걸이,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로비 그 자체였고, 관객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화 관계자들은 배우로서 그의 가치에 주목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는 <라스트 킹>, <비커밍 제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모든 영화들이 한 시기에 모여 있지만, 그의 커리어에 용수철이 되어준 작품은 <어톤먼트>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임스 맥어보이를 비롯해 <어톤먼트>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이 키이라 나이틀리를 제외하고는 무명에 가까웠는데, 이기적이고 변태적인 사업가 폴을 연기한 베네틱트 컴버배치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주노 템플, HBO대작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서 가엾은 배신자 테온을 연기한 알피 알렌, 그리고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흠 잡을 데가 없는 시얼샤 로넌까지. 이제는 너무도 유명한,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신인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다. 

소설 <속죄>는 놀랍도록 매력적이지만 스크린으로 옮기기에 꽤 까다로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원작이 담고 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와 관계를 2시간의 영상으로 압축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하는 부분들도 있었겠지만 영화의 각본을 맡은 크리스토퍼 헴튼이 그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으며(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를 영화로 각색하는 등 복잡한 연애 감정과 심리를 시나리오로 옮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다.), 감독 조 라이트의 연출 또한 흠 잡을 데 없어 소설만큼 매력적인 영화가 되었다.

이 작품 이후로 제임스 맥어보이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한다. <원티드>에서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했고, 블록버스터 <엑스맨>시리즈에선 젊은 자비에르 교수를 연기하고 있으며, 최근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글래스>에서 24개의 다중인격까지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그의 필모그래피가 어떤 영화들로 채워질지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그가 보여줄 캐릭터와 세계들이 더 다양해지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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