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편집자말]
어쩌다 일 때문에 인터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무사히 일을 마친 지금은 괜찮지만 그 당시에는 약간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한 글을 부탁받으면 무조건 거절한다. 그런데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인터뷰라니, 심지어 이건 직장 일이라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 인터뷰 글을 잘 써서 눈 여겨 보고 있던 지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얻었고 지인은 나에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란 독려를 건넸다. 하지만 당혹감에 손을 떨며 횡성수설을 하던 와중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뱉어버렸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저 웃기다가 나중에는 아리송했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저런 소리를 했을까. 흔히 말하길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말은 내가 꽁꽁 숨겨둔 속마음이었을까. 곰곰이 돌이켜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물론 세상에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좋은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가 모를 낯선 사람들도 그러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특히나 소수자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느끼는 환멸이 정확히 두 배가 됨을 의미한다. 인터넷을 잠깐만 돌아다녀도 세상에는 나 같은 동성애자들을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이들과 몸을 부대끼며 같은 사회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이런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도무지 인류애가 생기지 않네."

포커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몰리스게임>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물론 1년 365일 내내 이런 모난 마음을 의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모든 생각에는 향이 있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어도 은은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는 '친절한 사회인'의 역할을 하며 낯선 사람들에게 만들어진 웃음을 보이고 그들을 배려하는 척하지만 때로는 집에 가서 후회에 휩싸인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어쩌면 내가 오늘 내가 웃으며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했던 그 중년 여성은 주말에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설교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그들은 친절과 배려, (물론 가장된 것이라 해도)선의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을까.

억울해진다. 물건을 팔았는데 오히려 돈은 내가 낸 것 같다. 용기가 없어서 바보처럼 사는 것 같아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제정신인 사람의 생각인가, 세상을 향한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고 거기에 휘둘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든다.

그래서일까 내게 <몰리스게임>의 주인공 몰리는 정말로 신기한 인물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몰리 블룸은 실존 인물로 미국에서 거대한 포커하우스를 운영하며 '포커의 공주'(물론 몰리는 그 표현을 무척 싫어한다)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자신의 하우스에 러시아 마피아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며 그녀의 인생은 꼬이고 만다. 마피아 소탕을 벼르던 검찰이 그녀도 함께 재판에 넘겨버린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의 주된 배경은 도박판이다. 그리고 이는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이 내 기준에선 마음 놓고 막 대해도 괜찮은 종류의 인간들이란 뜻이기도 하다. 러시아 마피아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 사기로 돈을 끌어 모은 범죄자에서 멀쩡한 사람을 판돈 높은 포커 판에 끌어들여 그의 인생을 망친 인간까지. 심지어 그 중에는 대놓고 몰리를 착취하려다 실패하자 멀쩡한 그녀의 포커하우스의 문을 닫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로 아무런 품위도 배려도 보일 필요가 없는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는 셈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몰리의 배려와 희생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하지만 몰리는 내 기준에선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배려한다. 분수에 넘치는 판돈으로 포커를 치다 결국은 몰리에게 빚을 지게 된 사람을 그녀는 그저 그대로 돌려보낸다. 깡패들이 접근해 그런 이들에게 돈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해도 몰리는 거절한다. 가정이 있는 연예인이 메일로 사랑을 고백해도 몰리는 그 편지를 타블로이드지에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대신 그 남자에게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커리어를 망칠 짓을 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그런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심지어 검찰이 몰리가 고객들과 주고받은 메시지가 담긴 하드 드라이브를 넘기라고, 그러면 몰수한 재산도 돌려주고 무죄방면 해주겠다고 제안해도 몰리는 거절한다. 심지어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확률이 아주 높은 상황임에도 그렇게 한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가족을 파탄 낼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이유에서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몰리가 하드 드라이브를 검찰에 넘긴다고 해도 증거물은 원칙적으로 언론에 공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몰리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유출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일까. 그건 그냥 그들의 업보가 아닌가.

업무상 비밀과 자신의 부정을 떠들고 다녔으며 결혼까지 한 주제에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고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던 몰리의 고객들의 업보. 그들이 정말 감옥에 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일까. 심지어 그녀의 변호를 맡은 찰리의 말처럼, 그들은 몰리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며 비밀을 지키는 동안 고개 한번 들이밀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구해주려는 것에 감사조차 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등을 한 번 치는 것이 그렇게 못할 일일까.

나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결국 영화의 후반 찰리는 몰리에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냐며 분통을 터트린다. 그러자 결국 몰리는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에 찰리는 몰리의 이름 따윈 세상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몰리는 그 말에 이렇게 답한다.

"난 써요, 왜냐면 내게 남은 건 이름뿐이니까, 내 이름이니까, 그리고 평생 다른 이름은 없을 테니까"

흥미롭게도 영화의 초반 어린 몰리 블룸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아빠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믿진 않아요, 사람들을 믿진 않아요"

그녀의 말처럼 사람들은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란 때로 그다지 믿을 만한 구석이 없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쁜 점을 나에게 드러낼 수도 이를 통해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나의 일을 망치고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래서 충분히 나빠지지 않음은 바보처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악의와 증오와 배신은 반드시 등가로 교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그것을 전한 이들과 내가 똑 같은 밑바닥으로 떨어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몰리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손익과 당장의 안위를 따지는 대신 결국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가를 그녀는 질문했다. 그리고 포커하우스와 법원을 넘나드는 거대한 게임 판에서 몰리는 그것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승리했다. 

몰리가 겪은 '성공적인 실패'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영화 <몰리스 게임> 스틸컷ⓒ (주)영화사 빅


물론 냉정하게 계산서를 뽑아 본다면 몰리는 실패를 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전과자가 되었고 빚과 벌금 외에는 남은 것이 없으며 미래는 불투명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로 얻은 게 있냐고? 딱히 없다, 하지만 힘이 되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굴복시키기 힘든 사람이란 걸..."

그리고 몰리가 인용한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하는 능력'을 뜻한다면 몰리의 실패는 성공적인 실패다. 그리고 몰리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고 사람들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성취하고자한 목표를 향해 달리던 트랙에서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완주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저 불쌍하고 멍청한 존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 주변에 누구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똑 같이 발을 걸지 않을 수 있다면, 원칙을 어기지 않고 품위를 내팽겨 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결코 모난 사람들과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이름은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이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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