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포스터

▲ 로마포스터ⓒ 판씨네마(주)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보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중 한 가지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한다. 여성과 남성, 보다 정확히는 이 영화가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이야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로마>는 여성 주인공들이 보여준 삶의 자세와 연대, 그것이 가져다주는 치유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영화의 두 주역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분)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가 모두 여성이고, 두 사람이 각각 남성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지만, 서로 간의 연대로 이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원주민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입주가정부로 일하는 클레오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안일로 보낸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주인 내외가 시키는 온갖 일을 하다가 밤늦게야 잠에 든다. 지칠 줄 모르고 뛰노는 네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개가 곳곳에 싸놓은 똥까지 치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가 주인집을 위한 일이다.

그런 클레오에게도 자신을 위한 시간이 있다. 그건 바로 남자친구 페르민을 만나는 시간. 함께 가정부로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페르민은 클레오의 삶에 커다란 자극이며 기쁨이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는 클레오의 모습을 영화는 담담하지만 충만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모든 걸 뒤흔든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자를 배신하는 남자들
 
로마 남편이 떠난 뒤 소피아는 아직 어린 네 아이와 나이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 로마남편이 떠난 뒤 소피아는 아직 어린 네 아이와 나이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판씨네마(주)

  
즐거웠던 나날 끝에 페르민의 아이를 임신한 클레오는 이를 페르민에게 알린다. 클레오의 임신 사실을 들은 페르민은 그 길로 도망쳐 클레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클레오는 수소문 끝에 페르민을 찾지만 그의 모진 말과 행동에 상처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시간이 흘러 출산을 앞둔 클레오는 아이 침대를 사기 위해 찾은 가게에서 페르민과 우연히 조우한다. 훗날 '성체축일의 학살'로 불린 사건 가운데 페르민은 극우폭력단체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의 일원으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대를 짓밟고 섰다. 이날의 만남으로 클레오는 다시 한 번 비할 데 없는 고통을 받는다.

클레오의 안주인 소피아 역시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괴로워한다. 그녀의 남편은 젊은 여성과 바람 나 가족을 등진다. 소피아는 남편이 외국으로 출장을 갔다며 주변에 둘러대지만 진실은 이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극 중 새 여자와 살림을 차려 책장까지 모두 빼가는 남편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묘사되는데, 그야말로 치졸하기 짝이 없다.

알폰소 쿠아론이 복원한 내밀한 세계 가운데 두드러지는 남성성이란 도대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로마> 속 여성들은 어려움에 맞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끝끝내 지탱하려 하는데, 이에 반해 남성들의 캐릭터는 대개 비겁하고 위선적이며 허세에 차 있는 것이다.

남자라면 불편함을 느낄 만한 순간들
 
로마 영화는 클레오의 일상을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시선으로 지켜본다.

▲ 로마영화는 클레오의 일상을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시선으로 지켜본다.ⓒ 판씨네마(주)

  
클레오가 찾은 병원에서 등장하는 남자 의사는 알폰소 쿠아론의 남성 캐릭터들에 덧씌워진 일관된 성격을 더욱 짙게 드러낸다. 시종일관 클레오에게 다정했던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병실로 옮겨지는 클레오를 향해 집도의가 허락하지 않아 자신은 병실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 집도의가 동행을 허락하자 그는 예약환자가 있어 가봐야 한다며 말을 바꾸기 바쁘다. 영화 가운데 그나마 따스한 남성으로 그려졌던 그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뒤집던 순간의 민망함은 이 영화가 남성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 캐릭터 사이에 선명한 온도차를 내보이는 이 영화를 보며 적지 않은 이가 불편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남성이 이처럼 비겁하고 치졸하진 않을 텐데, 영화가 대다수 남성을 그런 식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저보다 약한 이를 감싸며 생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데, 그보다 강한 척하던 남성들은 고작 본인이 처한 위기를 모면하기에 바쁘니 좋게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페르민이나 소피아의 남편, 남자 의사가 보인 태도가 결코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란 점엔 아마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페르민과 소피아의 남편, 남자 의사를 데리고 살기 마련이다. 가진 것 없고 미래마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애인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남자가 떠올릴 법한 생각 가운데 페르민의 것과 같은 생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 가능성을 보았을 때 소피아의 남편과 같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된다.

남성을 위한, 남성에 대한
  
로마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본인의 어린시절 경험을 반영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 로마<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본인의 어린시절 경험을 반영해 극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판씨네마(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실제론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 마치 그럴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악해지기를 두려워하며, 짐을 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약하고, 그래서 쉬이 형편없어지는가.

<로마>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선택한 남성이 찍어낸 영화다. 그는 너무 약해서 강한 척 위장하고, 그래서 더 쉽게 부서져버리는 남성의 모습을 그대로 화면 위에 드러내고자 했다. 덕분에 이 영화는 위대한 여성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솔직한 남성의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위대함과 솔직함 가운데 무엇이 우리를 더 나은 상태로 이끌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위대함은 솔직함을 낳지 않지만, 솔직함은 위대함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남성을 위한, 남성에 대한 영화인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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