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새해 맞이용으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새해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배우 현빈. 태어나 이런 짓을 해 보는 건 처음이다. 일 관계로 엮인 사람들과 카톡을 하게 될 땐 살짝 민망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니 꿋꿋하게 사수 중이다.

카톡 사진을 본 지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너 외롭구나"라는 동정에서부터 "암요. 현빈은 진리입니다"라는 동조, "사실은 저도 현빈 팬이지 말입니다"라는 커밍아웃, "현빈과 함께 새해 즐겁게 보내세요"라는 '끼워팔기'(?) 새해 인사까지, 다채로운 반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현빈의 팬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달라진 건 밤 시간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습관처럼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현빈'을 쳐본다. 휴대폰 화면에 '주욱' 뜨는 현빈의 소식이나 사진을 보고 나면 그제야 하루를 잘 마감하는 듯한 산뜻한 기분이 든다. 덕분에 수면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어도 그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나도 현빈과 '동맹'이지 싶다.
 
사실 내가 현빈 '덕후'가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고 나서부터니까 기껏해야 2개월 정도 되었을 뿐이다. 게임이라고는 1도 안 하는 내가 무려 증강현실 게임을 다루는 드라마에 빠지다니. 나 스스로 놀랍다.

물론 중간에 위기도 있었다. NPC니 퀘스트니 당최 외계어 같은 용어들과 게임 룰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지 못한 건, 현빈의 빛나는 외모 때문이기도 하다. 이성을 붙잡고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현빈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증강현실 세계의 이야기가 어쩐지 현실과 소름끼치게 닮아서이기도 하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드라마 주인공인 공학박사이자 IT 투자회사 대표 진우(현빈)도 자신의 삶이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게임개발자 세주(찬열)의 전화를 받고, 스페인에서 처음 증강현실 게임을 테스트 했을 때만 해도 '대박'의 꿈에 흥분해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운이 자신에게 몰려온 듯한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꽃길을 열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 게임에서 예상치 못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때부터 엄청난 행운인 줄 알았던 게임은 무서운 재앙으로 바뀐다.
 
오류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친구 형석(박훈)과 가상현실게임에서 맞붙었다가 그를 칼로 찔러 죽이면서 발생한다. 비록 가상이지만 진우는 그동안의 감정을 다 쏟아 부은 터라 승리의 통쾌함을 만끽했는데, 다음날 형석이 현실 세계에서 시체로 발견돼 충격에 빠진다. 더 경악스러운 건, 분명 장사까지 지낸 그가 게임 속 '좀비'(NPC)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진우를 죽이려 한다는 점. 이건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살벌한 전투를 매일, 그것도 느닷없이 치러야 한다면 제정신일 수 있을까. 가장 큰 절망은 그런 하루하루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진우는 살기로 선택한다. 살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적보다 강한 레벨이 되어 좋은 무기를 얻는 것. 그러기 위해 칼 싸움, 총 싸움, 몸 싸움 온갖 싸움을 다 거치고, 주위로부터 미친놈 취급까지 받는 건 필수 과정이다.

치열한 전투를 거치며 레벨업을 거듭한 결과, 현대식 무기인 권총을 얻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형석과의 치열했던 검 결투는 싱거워진다. 게다가 진우의 심복인 서 비서(민진웅)와 게임 상에서 동맹을 맺으면서 한결 가벼워지고, 드디어 진우의 일상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다고 형석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뜬금포처럼 기타 연주에 맞춰 등장하지만, 전처럼 현빈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 좀 지겨울 뿐,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작가가 수많은 '떡밥'을 뿌려놔서 어떻게 정리할지 걱정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여주와의 로맨스는 왜 이리 진전이 없냐는 불평도 많다(사실 여주 캐릭터에서 대해선 불만이 많지만 여기선 논외로 하고). 하지만 나는 웬일인지 작가가 곳곳에 심어놓고 끈질기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더 궁금하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현빈을 위협하는 친구 형석처럼 나를 죽일 것처럼 위협하는 것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실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증오의 대상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존재에 대한 감정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내 열등감이나 질투, 낮은 자존감일 수도 있다. 어떻게든 끊어내고 싶은데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기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좀비처럼 살아나 괴롭히고 위협하고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리셋을 하거나, 로그아웃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선택은 정해져 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거나 살기로 결정했다면 드라마 속 현빈처럼 계속 레벨업을 하거나.

나를 위협하고 괴롭히던 것들에 대해 "저거 또 왔네~"하며 여유를 부리며 간단하게 총 한 발로 해결하는 수준에 이르는 레벨. 존경스러운 그 레벨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소위 말해 산전수전 공중전을 모두 겪어야 한다.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너나할 것 없이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곳에서 살아간다. '이럴 줄 몰랐던' 삶에서 로그아웃하지도 못한 채. 좀 살아보겠다고 시도했던 모든 것들이 실패한 2018년이었다. 되게 열심히 했는데도 실패하니, 뭐 하나 된 것 없이 시간만 보낸 것 같고, 허탈한 터였다. 열등감과 좌절이 좀비처럼 들러붙어 자꾸 스스로를 궁지에 몰고 있었기 때문에 현빈의 역할과 눈빛에 홀딱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궁색한 핑계인가 싶다만. 어쨌든 현빈 덕분에 '실패한 무익한 해'로 낙인찍었던 2018년도를 좀 다르게 볼 수 있게 된 건 맞다. "뭔가를 계속 하려고 하는 사람은 또 그만큼 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지금은 레벨업하고 있는 중인 셈이다.

'대박'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재앙이 될 수도 있듯이, 실패라 단정지은 것이 사실은 복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이치를 인정하며 당장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한 번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게 진정한 고수이리라. 주위를 돌아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그런 고수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고, 너그럽고, 겸손하고 품격 있으면서도 강한.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tvN

 
몰아치는 듯한 전개 속에서 현빈의 팬이 된 결정적 이유는 눈빛 때문이다. 친구였던 형석과 싸우다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심복이자 동맹이었던 서 비서가 형석처럼 게임 좀비가 된 것을 목격했을 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좀비 떼들과 싸우다 더 이상 칼을 들 힘조차 없어 싸우기를 포기했을 때. 절망과 슬픔과 죽음 앞에 선 자의 감정이 오롯이 담긴 눈빛은 어떤 장면이나 대사보다 강렬했다.
 
고수가 되어 가는 과정의 쓸쓸함과 절박함, 혼돈을 농익은 눈빛으로 연기하고 있는 현빈. 나이를 몰랐는데, 찾아보니 이제 38살. 제대하고 나서의 필모그래피도 눈에 띈다. 선택한 모든 작품이 성공한 건 아니나, 다양한 캐릭터를 실험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차곡차곡 변화를 시도하다 적당한 때에 대중적 인기도 얻어서 다행이다. 그도 배우로서 레벨업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남은 횟수는 단 6회. 그의 레벨업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지켜보는 과정이 쫀쫀하다. 덕분에 주말이 몹시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누가 동맹 아니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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