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잎들>의 작품 포스터

영화 <풀잎들>의 작품 포스터ⓒ 전원사

  
홍상수는 여태까지 네 편의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는데, <오! 수정>, <북촌방향>, <그 후>, <풀잎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네 편의 영화들이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흑백영화들은 어떠한 특정 경향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들었던 생각을 촬영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상수의 흑백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그의 칼라영화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흑백영화와도 다른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홍상수에게 어울리는 것은 칼라가 아니라 흑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홍상수의 흑백영화 중에서 두 편의 영화가 김민희와 함께 작업했고 그 두 편의 영화는 홍상수라는 사람이 김민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인다. 그 누구라도 두 영화에서 김민희의 모습이 여태까지 그가 다루던 여자들의 모습과 지극히 차별화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테다. 또한 그런 면에서 이것은 <자유의 언덕>에서 흩어진 편지들이 홍상수의 검은 만년필을 통해서 김민희에게 도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홍상수가 김민희를 위한 영화를 찍는 것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보다 솔직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풀잎들>은 홍상수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를 촬영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홍상수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중요하며, 홍상수라는 사람이 연애편지가 아니라 수필을 쓴다는 점을 알려주고, 영화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수라는 사람이 무언가를 의도하고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나면 그의 영화가 극이 아니라 수필임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번 홍상수의 일기장을 들고 독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이것을 이야기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도 내 주변에는 없을 것이라는 영화적 거리감이 그것을 만들어 내며,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수필이기에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풀잎들>의 한 장면

영화 <풀잎들>의 한 장면ⓒ 전원사

  
사랑의 사고 실험

66여분 동안 골목 구석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이 영화는 김민희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전부다. 그녀는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길거리에 널린 풀잎들이 되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그런데 영화에는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고, 이것은 영화의 도입부와 결말부에서 카페 앞에 심어진 풀잎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풀잎이라는 존재는 길거리에 흔하지만 흔하게 들여다보기도 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홍상수는 세상이 자신의 생각을 엿보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이것은 보여지는 동시에 보는 대상인 카메라의 성격과도 유사한 것 같다. 

<풀잎들>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홍상수의 리얼리즘은 현실에서 따온 게 아니라 홍상수의 현실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요컨대 홍상수의 영화는 현실의 그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늘 명확히 했고, 그것은 곧 이 영화가 홍상수라는 사람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사고 실험임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북촌방향>이라는 실재하는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우리는 <오! 수정>에서 다투어 <북촌방향>의 초대를 받아 <그 후>의 택시를 타고 <풀잎들>의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풀잎들에는 영화가 현실처럼 칼라인 게 아니라 흑백이기에 더욱 영화처럼 보인다는 점이 스며있었고, 다시 말해서 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게 오히려 우리의 현실 쪽에 있다고 홍상수는 말하고 있다. 즉 홍상수의 사랑은 영화이며 그것은 현실이다. 반대로, 홍상수의 영화는 그가 되고 싶거나 혹은 그럼에도 될 수 없는 현실의 장벽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홍상수라는 사람이 남긴 필체를 쫓게 된다. 그런데 그 필체에는 마치 풀잎과도 같은 유약함이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영화의 밖이 아니라 안에서 줄곧 들려오며, 그러면서도 마치 그는 의도적으로 삽입되었다는 듯이 그들의 대화를 필사적으로 방해하려 든다. 음악이라는 이름의 그는 인물의 대화가 격해질 때면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며, 동시에 머릿속에 낀 잡음도 함께 높아진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수필로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음의 존재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잡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 사이의 관계는 관계 속에서만 잦아진다는 것이고, 그들은 오로지 소리 밖으로 나와 풀잎들을 바라볼 때만 유약해질 수 있다.
 
홍상수는 이 영화의 인물들을 유목민처럼 보여준다. 그들은 대화할 장소를 찾아 줄곧 헤매고 있으며 사실은 그들의 대화가 이루어질 곳이 본래 제 자리였음을 우리는 후에 깨닫게 된다. 싸우던 이들이 싸우지 않게 되며 자책하던 이들은 자책을 공유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두 한자리에 앉아 태연히 남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김민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홍상수는 김민희를 통해서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듣는 존재에게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 것인가. 어쩌면 이 존재가 하느님이 될 수도 있겠으나 홍상수의 인물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사는 게 너무나도 고달픈 나머지 신을 믿을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체로 신이 되어 살아가고, 이 영화에서는 그런 관찰자의 자리가 거리의 풀잎들에게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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