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늘 생각나는 친구 샤인(애칭)과 약속을 잡았다. 연말 기분도 낼 겸 공연이나 전시를 볼까 검색하다가 영화 <로마>를 찾았다. 상영관이 워낙 몇 개 안 되는 데다 낮에 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압구정에 위치한 예술영화관 이봄 씨어터. 팔자에 없는 압구정에 가 볼 기회다.

경기도 변두리에 사는 나는, 산자락 끝에 위치한 아파트에 사는 까닭에 눈만 돌리면 청솔모나 가끔은 고라니를 만나며 <나는 자연인이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영위 중이다. 그런데 압구정은 '역쉬' 신세계다. 사람이 많다. 것도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친구와 나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눈 호강을 즐겼다.

멕시코 로마에서 '을 중의 을'로 살아가는 여성 클레오
   
<로마>는 이름만 들어도 기대치가 높아지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넷플릭스와 손잡고 제작한 영화다. <칠드런 오브 맨>(2006)과 <그래비티>(2013)를 만든 그 감독 말이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했기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국내 멀티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다.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장면 등을 감상하자면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영화인데 말이다.

흑백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매 순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장면들과 그 시절의 풍경에서 녹음해 틀어놓은 것 같은 디테일한 사운드까지. 그리고 영화 제목인 '로마'는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다. 이는 중산층 가정이 모여 사는 멕시코 시티의 지역 이름이다.
 
이 영화는 제75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각종 비평가상을 휩쓸었고 내로라하는 영화저널에서 뽑은 올해의 최고의 영화에 선정된 작품이다. 칸 영화제에서는 넷플릭스 영화 자체를 출품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선정이 될 수 없었지만,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에서는 여러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있다. 대체 어떤 영화길래 2018년 시상식을 싹쓸이 하는 걸까.
    
<로마>는 쿠아론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은 자전적 영화로, 1970년대 가정부로 일하며 자신을 키워준 여성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을 중의 을'로 살아가는 인디오 출신의 가정부 클레오. 영화는 그녀의 일상을 담고 그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자기 자리로 돌아와 삶을 살아내는 여인의 부드럽고 강한 이야기다. 영화에는 클레오가 "나는 이런 비참한 일을 겪었어"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1도 없다'. 그럼에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다울다 가슴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직접 카메라를 들고 이 영화를 촬영했으니 소위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셈이다. 제작 과정도 흥미롭다. <로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첫 출연작인 일반인들이다. 감독은 자신이 기억하는 클레오의 모습과 최대한 비슷한 멕시코 원주민을 찾았고, 마침내 찾아낸 배우가 클레오역을 맡은 '얄리차 아파리시오'다. 그리고 얄리차의 연기를 편안하게 해줄 요량으로 '룸메이트 가정부 역'에 그녀의 절친인 낸시 가르시아를 함께 섭외했다. 이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 되나 보다. 친구 따라 영화배우라니.

감독은 이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된 베니스 영화제에 클레오역의 실제 모델이었던 '라보 로드리게스'와 함께 참석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라보를 위하여'라고 자막을 쓰고 공식적으로 그녀에게 헌정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하다. 감독은 사회적 약자인, 그래서 감히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그녀를 대신해 영화에 그녀의 서사를 풀어냈다. 그리고 영화 속 카메라는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평범한 것을 담아 위대한 장면으로 보여주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소피아의 집이다. 백인 중산층 가족이 거주하는 이곳에는 소피아와 그녀의 엄마, 운전기사와 클레오를 포함한 가정부 두 명, 소피아의 아이들 넷, 그리고 가끔 집에 들르는 남편이 사는 공간이다. 영화는 초반에 두 갈래를 보여준다.

소피아에게 벌어진 현실과 클레오에게 닥친 현실. 영화 초반 소피아는 어린 아이 넷을 남겨두고 무책임하게 다른 여자 품으로 가버린 남편이 다시 돌아오길 초조히 기다린다. 불안한 마음에 감정의 기복이 커질 수밖에 없는 소피아를 대신해서 클레오는 아이들을 돌보고 토닥이고 종일토록 집안일을 한다.
    
아침이 되자 열 살 아래로 보이는 아이들을 차례로 깨워 밥을 먹이고 학교를 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몸을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노래하며 깨우고, 이마에 키스하며 부드럽게 일으키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힌다. 사랑이 가득 묻어나는 이 장면을 보다가 느닷없이 뭉클해졌다. 아들 둘을 키워내느라 아침마다 일어나라고 소리 지르는 게 예사였던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매 순간 평범한 것을 담아 위대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클레오는 남자친구 페르민과 사랑을 나눈다. 이 장면 굉장히 당황스럽다. 페르민은 벌거벗은 채로 샤워 봉을 휘두르며 무술시범을 보이는데... '허세 작렬'하는 이 남자, 참 민망하다. 무술을 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묻는 클레오에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사느라 망가진 자신의 인생을 무술이 바꿔 놓았다며, 무술은 자신을 사람답게 살게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가 나를 바라봐줄 때도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이 대사 익숙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나오는 명대사. 무대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묻는 메리에게 프레디가 한 말. "나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틀리고 싶어도 틀려지지가 않아.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아. 너가 나를 바라볼 때도 그런 느낌이 들어." 음... 어디 작업 매뉴얼에 나오는 말인가. 하지만 연예인들 '같은 옷 다른 느낌'처럼 이 대사도 '같은 말 다른 느낌'이다.
 
영화 보다가 울음소리 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았다
   
페르민은 임신한 클레오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협박한다. 소피아의 남편 또한 결국 소피아를 떠난다. 그렇게 남겨진 두 여자는 아이들과 노모와 함께 서로를 보듬으며 이 상황을 헤쳐 나간다. 고난 극복을 위한 눈물 나는 약자들의 연대. 롱 테이크로 촬영된 바닷가 씬은 압권이다. 여태까지 점층적으로 끌어온 감정을 다 쏟아내는데 나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다시 일상이 되풀이 된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다고 모든 게 해피엔딩은 아니다. 또 다른 고난이 다가오는 것, 또 다시 살아내는 것. 평범한 우리는 어쩌면 하나씩 잃으면서 하나씩 배워가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또 다른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이 영화에는 많은 메타포가 숨어 있다. 클레오의 현실을 보여주는 새장 속의 새, 마당에 갇힌 개, 땅바닥 물웅덩이에 갇힌 듯이 비치는 하늘. 소피아가 주차하기도 버거워 하는 큰 자동차는 남편의 허세를 상징하고, 백인들이 허공을 쏘는 사격 장면이나 저택 안에 전시된 박제들은 백인들의 멕시코 수탈을 보여준다. 극 중 남자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폭력적이고 비겁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반면, 여자 캐릭터는 서로 포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당시 어린 아이였던 감독의 눈에 비친 현실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거리로 나왔다. 울고 나면 다 착한 얼굴이 되는 것 같다. 창백해진 샤인의 얼굴이 더 예뻐 보였다. 요즘 부쩍 외로움을 많이 타는, 비혼인 샤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것 봐, 이런 찌질한 사람들 만나느니 혼자가 속 편할지도 몰라." 친구는 희미하게 웃었다. 영화의 제목인 'ROMA'는 거꾸로 하면 'AMOR'(사랑)가 된다. 내년에는 친구에게도 꼭 좋은 'AMOR'가 생기길... 그리고 이 글의 끝에 이렇게 쓴다.

'샤인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