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물을 접하고 난 기대주들은 확실히 이전보다 한 뼘 더 성장해 있었다. 피겨 차준환과 임은수가 회장배 랭킹대회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랑프리 메달리스트 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차준환과 임은수는 23일 오후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열린 KB금융 2018 피겨스케이팅 회장배 랭킹대회 남녀 1그룹 경기에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차준환과 임은수는 확실히 지난해와 다르게 노련하면서도 성숙한 모습을 물씬 풍기며 시니어 그랑프리에서 쌓은 경험이 큰 자산이 됐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차준환의 프리 연기 모습

차준환의 프리 연기 모습 ⓒ 박영진

 
차준환, 무너진 부츠에도 클린연기

올 시즌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차준환은 이날 무너져서 더 이상 발목을 지탱하기 조차 힘든 부츠를 신고도 4회전 점프를 비롯한 7차례 점프 요소를 그랑프리 때 구성과 동일하게 배치해 모두 성공했다. 그는 앞선 국제대회에서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 남자피겨 사상 최초로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진출해 동메달을 거머쥐며 무서운 상승세를 과시했지만, 아직 실전에서 4회전 점프 두 개를 모두 다 깨끗하게 성공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랑프리 때보다 더 좋지 않았던 부츠를 신고도 차준환은 기어코 국내에서 4회전 점프를 비롯한 점프 클린 행진을 펼치며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그는 이번 랭킹 대회 연습기간부터 대회 당일까지 계속해서 부츠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는 모습을 보여 썩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피겨 선수에게 생명과도 같은 부츠가 좋지 않음에도 차준환은 실전에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기술을 비롯한 자신의 연기에만 몰입했고 그 결과 프리스케이팅에서만 무려 180점대에 육박하는 점수를 받았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최고의 점수를 냈다는 점을 보면 정신력도 상당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대목이다. 차준환은 전날 쇼트프로그램 경기에서 4회전 점프가 2회전에 그치면서 큰 실수가 나와 연기 후 머리를 감싸고 속상해 했던 것과 달리, 프리스케이팅 연기 직후 차준환은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인사했다.
 
차준환은 경기를 마치고 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클린 연기보다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다. 좋은 경기한 것 같아 다행"이라는 그는 "부츠가 좋지 않았고 부상이 있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연습 땐 (두 차례 4회전 점프) 클린을 많이 했는데 경기할 때마다 점프 하나에서 실수가 나와 아쉬웠다. 오늘은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잘 한 것 같아 굉장히 만족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임은수의 프리 연기 모습

임은수의 프리 연기 모습 ⓒ 박영진

 
베이징 트로이카 전쟁, 승기 잡은 임은수

여자 1그룹 경기에서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향한 '트로이카' 임은수(15·한강중), 유영(14·과천중), 김예림(15·도장중)의 경합이 치열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서 활짝 웃은 선수는 임은수였다.
 
임은수는 쇼트프로그램 때부터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쇼트프로그램 경기를 앞두고 6분간 윔업 과정에서 그는 대부분 점프에서 회전이 풀리거나 착지가 불안하는 등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난 후 그는 계획했던 모든 기술 요소를 성공하며 클린 연기를 펼쳤다. 서정적인 선율에 맞춰 아름다운 안무와 함께한 연기는 관중들이 몰입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연기가 끝나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지며 웃었다.
 
이튿날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임은수는 두 번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준비했다. 아직 올 시즌에서 연결 트리플 점프 두 개를 모두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 대회를 앞두고 공식연습과 웜업 과정에서 두 점프를 모두 무난히 해내면서 기대감은 더욱 높았다. 그러나 연기 초반 트리플 루프 점프에서 착지가 조금 어긋난 이후부터 흔들렸다. 올 시즌 도입과정을 바꾼 트리플 살코 점프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후반부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그는 연결 점프를 뛰지 않고 단독 점프로 마무리 했고, 트리플 플립과 점프에서 더블 토루프 점프로 연결해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성했다. 스텝이나 코레오 그래피 시퀀스에서 보여준 도도하고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연기는 매끄럽고 훌륭했지만 점프에서 2%의 아쉬움을 없애지는 못했다.
 
 유영의 프리 연기 모습

유영의 프리 연기 모습 ⓒ 박영진

  
유영과 김예림도 모두 아쉬움이 있었다. 유영은 이번 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첫 점프로 트리플 악셀을 과감히 도전했다. 공식연습과 윔업 과정에서 몇 차례 성공하기도 해, 국내 대회에서 여자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은연중에 생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번 모두 회전이 부족한 상태로 넘어지고 말았다. 특히 쇼트프로그램에서는 이 여파로 트리플-트리플 점프에서 마저 넘어져 점수가 크게 뒤처지고 말았다.
 
그러나 프리스케이팅에서 유영은 달랐다. 마치 독을품고 연기하는 것처럼 유영은 트리플 악셀 점프에서 넘어졌음에도 이후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등 계획했던 나머지 기술요소를 모두 성공해 나갔다. 지난시즌 프로그램으로 사용했던 '캐리비안의 해적 OST'에 맞춰 연기했기에 표현력이나 안무 수행은 훨씬 더 매끄러웠다. 결국 유영은 연기를 마친 직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김예림의 프리 연기 모습

김예림의 프리 연기 모습 ⓒ 박영진


 
김예림은 쇼트프로그램에서 스핀에서 레벨2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매끄러운 연기를 선보이며 국내대회 첫 우승이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트리플 루프에서 손을 짚는 실수와 후반부 트리플 플립 점프를 1회전으로 처리하는 결정적인 실수로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세 선수 모두 실수가 있었지만 모두 주니어 그랑프리와 시니어 그랑프리 등에서 활약하면서 차곡히 쌓은 경험은 분명히 큰 자산이 됐다.
 
임은수는 "이번 경기도 그렇고 그랑프리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경기를 수행해서 자신감을 얻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번 대회에서는 실수가 있었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이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유영은 눈물을 흘린 이유로 "올시즌에 너무 힘든 일이 많았다"면서 "전날 쇼트에서 실수로 마음에 걸렸다"고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 종합선수권에선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 했다.
 
이들의 선전으로 한국 여자피겨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하지만 매번 국내대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하는 세 선수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러한 경쟁을 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임은수는 "(유)영이와 (김)예림이는 모두 잘하는 선수라 좋은 자극이 된다"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동료를 격려했다.
 
큰 물에서 경험하고 난 이들은 눈빛부터 이전과 달라졌다. 실수가 나온 직후에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등 승부사의 기질을 보여주기도 하고, 차가웠던 은반은 불보다 더 뜨거운 경쟁으로 가득찼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 피겨가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