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스트맨> 포스터.

영화 <퍼스트맨> 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오랜 사랑을 잃고 많이도 힘들었다. 마침 하던 일도 잘 풀리지 않던 때여서 무너지는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가만히 있자니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도대체 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뛸 수 없을 때까지 뛰어도 보고 강변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아도 봤지만, 언제고 걸음을 멈추면 처음보다 큰 무력감을 마주하곤 하였다. 버려진 마음이 홀로 폐허를 뒹구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고통은 선명해졌다. 손을 내밀어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지만 후회는 깊고 상실은 커서 무엇에도 닿지 못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은 길고 질었다.

<퍼스트맨>은 그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한 사내가 감당키 어려운 상실과 마주해 슬퍼하고 절망하며 스스로를 극단까지 몰아가는 이야기며, 흐르는 시간도 어쩌지 못할 만큼 커다란 구멍을 부여잡고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내는 이야기이다.

이젠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미언 셔젤은 이 영화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사내와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의 관점에서 풀어냈다. 한 사내의 광적인 열정 앞에 아내와 자식들의 마땅한 요구는 제단에 오른 어린 양처럼 쉽게 희생된다. 일견 전작인 <위플래쉬> <라라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으로, 감독 자신의 예술적 지향과 선호가 그대로 투영된 부분이라 하겠다.

영웅의 서사 아래 묻힌 닐의 개인적 이야기를 꺼내다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위험을 무릅쓰며 우주비행사로 성장해가는 닐(라이언 고슬링 분).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위험을 무릅쓰며 우주비행사로 성장해가는 닐(라이언 고슬링 분).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주인공은 인류 역사상 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 분), 그가 테스트파일럿으로 근무하던 1961년부터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로 달에 착륙하는 1968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깨나 본 사람에게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하면 대부분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론 하워드의 <아폴로 13>,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터스텔라> 가운데 하나, 혹은 이들을 꼭짓점으로 한 도형 가운데 어느 한 지점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는 대부분의 우주영화가 이들 명작들이 이룬 성취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퍼스트맨>은 이 도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배경과 소재가 우주와 우주로 나아가려는 비행사일 뿐, 이야기의 초점은 상실을 메우려는 남자의 비명에 가까운 분투와 그를 지켜보는 가족의 어려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데이미언 셔젤을 비롯한 제작팀의 목표가 달에 첫 발자국을 새긴 영웅의 서사 가운데 파묻혀 있던 닐의 개인적 이야기를 발굴하는 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이유다.

딸을 잃고 달로 향한 아버지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닐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속 깊은 이야기는 좀처럼 털어놓지 못한다.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닐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속 깊은 이야기는 좀처럼 털어놓지 못한다.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의 도입, 닐의 두 살배기 딸 캐런은 뇌종양이란 몹쓸 질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캐런은 고작 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딸을 잃은 닐은 그대로 무너져서 일어날 줄 모른다. 불안한 심리상태로 문제를 일으켜 테스트파일럿 일까지 그만두게 된 닐은 항공우주국의 우주비행사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한 끝에 극적으로 합격한다.

이후 닐은 극단적인 위험과 끝없이 마주한다.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향하는 건 당시로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프로젝트로, 동료 비행사 여럿이 그 과정에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닐은 이 모두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스스로도 큰 위기를 수차례나 넘기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영화는 닐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달에 가고자 했는지를 묻는다. 항공우주국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내내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그가 어째서 그 모두를 짊어진 채 달에 가려 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답은 닐이 달에 이르고서야 드러난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유명한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그려지는 한 장면, 닐이 딸의 팔찌를 달 위에 놓아주는 장면이 바로 그 답이다. 이는 지구에선 도저히 놓을 수 없었던 딸을 달에서 놓아주는 일종의 의식으로, 닐에게 있어 딸의 죽음을 인정하고 떠나보내는 관계의 마침표와 다르지 않다.

모두가 제 삶의 퍼스트맨이다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딸을 떠나보내고서야 비로소 가족 곁으로 돌아온 닐.

영화 <퍼스트맨> 스틸 컷. 딸을 떠나보내고서야 비로소 가족 곁으로 돌아온 닐.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한자문화권에선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을 가리켜 참척의 변(慘慽之變)이라 하였다. 참혹하게 서러운 일이란 뜻으로, 평생토록 씻기지 않는 고통 가운데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밖엔 다른 도리가 없다고 했다. 딸을 잃고 닐이 마주한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본다. 가까이 다가서는 모두를 매몰차게 내치고, 심지어는 아내와도 딸과 관련한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으면서, 남몰래 딸의 팔찌를 지니고 달로 향했던 그의 마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자신보다도 중하게 여겼던 무엇을 잃어본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속 깊은 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지구에서 잃은 딸을 달에서 놓아주던 그 장면으로부터 상실을 극복하는 한 인간의 위대함을 보았다고도 하였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서조차 생은 스스로를 일으키려 하는 법이며, 닐을 달로 이끈 것도 바로 그런 생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누구나 한 번쯤 상실을 마주하게 된다. 꿈을 꾸고 꿈을 잃는 것도,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도 그래서 모두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흔한 상실에 의연할 수 없는 건, 모두가 제 삶을 처음 살아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제 상실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제 삶보다 사랑한 무엇이 떠나갔음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삶을 추슬러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남겨진 자의 몫이다.

한 마디 울음 없이 그 긴 시간을 버텨 마침내 달에 이른 닐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 끝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는 딸의 팔찌를 보는 것이, 가슴 깊은 상실에 휘청거리면서도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모두에게 진한 위안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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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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