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약왕>.

영화 <마약왕>. ⓒ 하이브미디어코프

  
19일 개봉한 송강호 주연 <마약왕>은 부산-현해탄-일본을 넘나들었던 히로뽕(필로폰) 밀수업자 이두삼을 다룬 영화다. 이두삼의 실제모델이 1970년대 국내 최대 마약업자 이황순이라는 점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져 있다.
  
금 세공업자였다가 금괴 밀수 조직과 손잡으면서 밀수의 세계에 눈을 뜬 영화 속 이두삼은 징역을 살고 나온 뒤 필로폰 밀수출에 착수한다. 1970년대에 강조되던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므로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뒤 수출하는 방식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을, 이두삼은 필로폰 분야에 응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로 필로폰 산업이 위축된 일본에서 원료를 수입해 부산에서 가공한 뒤 일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영화 속 이두삼은 1980년 3월 체포된다. 이로부터 7년 뒤 부산지검 울산지청으로 발령난 검사가 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타격을 받은 직후부터 권력형 비리와 조폭 수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될 인물이었다. 훗날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지게 될 3년차 검사 홍준표(당시 33세)가 바로 그였다. 그의 회고록 <소신이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울산지청에 근무하던 삼십여 년 전 1988년 4월, 나는 울산이 지역적으로 마약 창궐 지역인 부산과 인접해 있어서 마약사범이 많을 것으로 단정하고, 본격적인 마약 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홍준표 검사가 언급한 바로 그 부산에 거점을 뒀다는 것이 영화 속 이두삼의 강점이다. 지역적 이점이 그의 사업에 큰 밑천이 됐다.
 
영화에서는 그가 만주에서 내려와 부산에 정착했다고 거듭 강조한다. 마약'왕'에 걸맞은 국제적 스케일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 같은 인상을 줄 만한 설정이다. 하지만 1980년 3월 20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실제인물 이황순은 만주가 아니라 충북 청주 출신이었다. 대학도 충북에서 졸업했다. 그 뒤 부산에 정착해 금괴 밀수를 하다가 나중에 필로폰 밀수에 뛰어들었다. 
   
 <경향신문> 1980년 3월 20일자 <초현대식 장비갖춘 한국판 마피아>

<경향신문> 1980년 3월 20일자 <초현대식 장비갖춘 한국판 마피아> ⓒ 경향신문

    
영화 속 이두삼은 필로폰 밀수출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말 그대로 떼돈을 번다. 수출이 곧 애국이던 1970년대에 1등 마약 수출업자가 되어 외화를 벌어들인다. "대한민국은 내가 먹여 살린다"며 자화자찬할 정도다.
 
실제 이황순도 큰 돈을 벌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의 그도 호화주택에서 생활했다. 영화에는 이두삼이 CCTV를 통해 외부를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1970년대에 저런 장비를 집에다 갖췄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실제의 이황순의 저택은 개집마저 호화스러웠다. 위의 <경향신문>은 "잘 훈련된 맹견 4마리는 대문 안 왼쪽에 붉은 벽돌로 지은 3평 규모의 호화 개집에 가두어 두었다가 밤에만 풀어"놓았다고 보도했다. 3평 벽돌 개집은 웬만한 개들이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다. 개집마저 화려할 정도로 이황순 저택은 고급스러웠다. 
 
 <경향신문> 1980년 3월 20일 <부산 넷 검거 히로뽕 밀조단 경찰과 총격 대치 3시간>

<경향신문> 1980년 3월 20일 <부산 넷 검거 히로뽕 밀조단 경찰과 총격 대치 3시간> ⓒ 경향신문


영화에서는 이두삼 저택의 CCTV만 보여주지만, 실제 이황순 저택에는 고성능 음파탐지기까지 있었다. 위 <경향신문>은 "대문과 집 주변에는 고성능 음파탐지 시설을 통해 외부인이 집 주위 2미터까지 접근하면 안에서 발자국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돼 있다"고 보도했다. 낙랑국 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자명고가 집 안에 있었던 셈이다.
 
영화 속 이두삼은 CCTV를 통해 외부를 관찰하지만, 실제의 이황순은 굳이 그걸 안 보더라도 '자명고' 소리만 듣고도 침입을 감지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그런 시설을 갖췄을 정도로 대단한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영화 <마약왕>.

영화 <마약왕>. ⓒ 하이브미디어코프

  
대저택에서 호화 생활을 한다는 점 외에, 영화 속 이두삼의 성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표는 활발한 공개활동이다. 음지 세계에서 돈 버는 사람답지 않게 그는 양지활동을 많이 한다.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박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에서 연단 귀빈석에 앉을 정도의 정치자금 기부활동도 한다. 직업을 감안할 때, 그의 공개활동은 상당히 적극적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개 활동을 어렵게 하는 제약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황순은 공식적으로 도망자였다. 금괴 밀수로 4년형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년 만인 1973년 11월 13일 폐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행방을 감추었다. 그 뒤 검찰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그랬기 때문에 집 밖에서 공개 활동을 하기는 힘들었다.

위의 <경향신문>에서는 "75년 11월부터 77년 9월 사이 히로뽕 70킬로그램을 밀조해 판 혐의로 검찰의 수배를 받아 왔었다"고 보도했다. 검찰의 수배를 받는 상태였으니, 공개 활동은 더욱 더 힘들었다.

이황순과 더불어 1970년대 필로폰 제조업계 4대 거물로 불린 신상호는 공개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1980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경남 진주시 거주자인 신상호는 "지역정화위원 등 여덟 개의 사회적 직함을 갖고 당당한 지방유지 행세를" 했다. 그는 이황순보다 법적으로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
 
 영화 <마약왕>.

영화 <마약왕>. ⓒ 하이브미디어코프

 
 영화 <마약왕>.

영화 <마약왕>. ⓒ 하이브미디어코프

  
<마약왕>은 이두삼의 화려한 성공을 보여준 뒤 내리막길도 자세히 추적한다. 영화는 이두삼이 무너지는 과정을 두 가지 방법으로 조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두삼의 사업이 박 정권과 운명일체 관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박 정권이 무너짐과 동시에 이두삼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순식간에 몰락한다는 것이다. 
 
실제의 이황순이 체포된 것은 1979년 10·26 사태(박정희 암살) 직후인 1980년 3월 19일이다. 언뜻 보면 이황순의 운명이 박 정권의 명운과 연동됐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양자의 관련성을 그렇게까지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좀 따른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장군은 사회기강을 확립하고 정부 권력을 획득할 목적으로, 1980년 1월 17일 내무·법무장관 및 계엄사령관 합동 명의로 '사회기강 확립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에 따라 밀수 범죄 등을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착수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직격탄을 맞고 이황순이 몰락했을 뿐이다. 박 정권 핵심부와 어떤 연관이 있어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이 거대한 경제적 부조리에 기댔던 것은 사실이다. 이황순이 그 속에서 부를 축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황순은 그 거대한 부조리의 일부를 차지했을 뿐, 이전 정권과 관련돼 적폐청산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황순은 정상으로 올라갈 때뿐 아니라 정상에서 내려오는 과정도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영화 속 이두삼은 자택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스스로 자해한다. 실제의 이황순도 군경과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던 중 자살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 체포 당시 오른쪽 어깨에 총알 20알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1981년 4월 28일 이황순은 대법원 선고에 의해 징역 15년형을 확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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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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