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영화 <귀여운 여인> 포스터

영화 <귀여운 여인> 포스터ⓒ Buena Vista Pictures

 
시대가 변하면서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요즘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어제의 유머가 오늘의 '막말'이 되기도 하고, 어제 지극히 상식적이었던 말과 행동이 오늘에는 완전한 몰상식이 되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귀여운 여인>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는 엄청난 흥행을 했고,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를 단숨에 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으며, 여자들은 리차드 기어를 이상형으로 꼽았다.

성공한 사업가와 가난한 '콜걸'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가 나온 당시에도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흥행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다수의 대중들은 이 영화가 가진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불편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만약 2018년에 이와 같은 영화가 개봉했다면 반응은 어땠을까?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극중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성매매를 하는 '콜걸'이다. 일할 때 신는 부츠는 다 벗겨져서 까만 펜으로 칠을 해야 하고, 겨우 마련한 집세는 룸메이트가 약을 산다고 갖고 나가버려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판이다. 그녀가 일하는 구역에서 '콜걸'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룸메이트는 자신들도 안전을 위해 포주를 두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그녀가 처한 상황은 현실적으로 최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다행히(?)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 설정일 뿐. 게다가 비비안은 마치 콜걸을 연기하는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보인다. 싸구려 드레스, 진한 화장과 가발, 그리고 그녀의 터프한 걸음걸이와 말투에도 그녀는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이 영화가 가지는 판타지의 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줄리아 로버츠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유쾌함이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할리우드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그녀 앞에 근사한 스포츠카 한 대가 선다. 운전자는 호텔로 가는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녀가 보조석에 올라타 길을 안내한다. 남자의 이름은 에드워드(리차드 기어). 재정적으로 힘든 기업들을 인수해 분해하고 되파는 일을 하는 사업가다. 호텔까지 가면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에드워드는 명랑한 비비안에게서 순수한 매력을 느낀다.

에드워드는 돈을 주고 그녀와의 시간을 샀음에도 그녀를 콜걸이 아닌 숙녀 대하듯 젠틀하게 대하고 일주일간 그의 데이트 상대가 되어 줄 것을, 그러니까 잠자리가 아닌 사업상 미팅 자리나 파티 자리에 동석해 줄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콜걸과 고용인이 아닌 마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처럼 가슴 떨리는 시간을 보내고 몇 번의 갈등도 겪는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일주일간의 계약이 끝나고,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 윤리보다 사업 성공을 중요시 여겼던 일 중독자 에드워드의 우선순위와 인생의 가치는 비비안으로 인해 달라졌고, 그것은 비비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자존감을 끌어 올리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영화는 에드워드를 리무진 탄 왕자님으로, 비비안을 공주님으로 만들면서 끝을 맺는다. 
 
줄거리를 옮겨 적는 게 무의미 할 만큼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이 영화가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을 연기한 두 배우의 매력에 있을 것이다. 특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줄리아 로버츠의 시원한 미소와 명랑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비비안이라는 캐릭터의 본분을 잊고 그녀가 가진 따뜻함과 순수함에만 집중, 자신을 그녀에게 대입하게 만든다.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관객들의 몰입은 보다 강력해지고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에 철저히 무장해제 되는 것이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상류층인 에드워드의 데이트 상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매너들을 비비안은 아주 빠르게 배워나간다. 비비안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우아함을 끌어내 주고 그녀를 숙녀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극 중 남성들이다. 호텔 직원 바니는 테이블 매너를 가르쳐주고, 에드워드는 그녀와 함께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관람하고(하필, 품위 있는 매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라니), 자선행사에 대동한다.

명품 드레스를 입은 그녀에게서 '콜걸'의 이미지를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에드워드의 변호사 필립이 비비안의 직업을 알고 난 뒤 그녀에게 더러운 추파를 던지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신분 차이는 서로가 사랑을 느끼는 데 있어 장애가 아닌 매력으로 작용한다. 에드워드는 생전 처음 접하는,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하는 오페라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비비안에게 빠져들고, 비비안은 에드워드의 부와 자상함에 자신이 동화 속 공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비비안은 백마 탄 왕자가 자신을 구하러 올 리는 없다고(무엇으로부터 구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에드워드와의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동화가 현실이 될 수 없음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다행히도 에드워드는 비비안의 동화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재력과 마음, 거기다 매력적인 외모까지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판타지를 완전하게 충족시킨다.

리무진을 타고 와 꽃다발을 들고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리차드 기어의 모습에 1990년의 관객들이 열광했다는 것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놀랍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비비안와 에드워드가 뜨거운 입맞춤으로 신데렐라 이야기를 완성하는 동안, 로이 오비슨이 부른 '프리티 우먼'과 함께 웬 남자의 독백이 들려온다. "꿈의 전당 할리우드로 오세요. 꿈이 실현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죠. 하지만 여기는 헐리우드랍니다. 계속 꿈을 꾸세요." 이 대사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할리우드이기에 가능한, 단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는 작가와 감독의 변명으로 들린다. 과연 <귀여운 여인>이 보여 준 꿈은 2018년에도 유효할까?

백마 탄 왕자님이 공주를 구함으로서 마무리 지어졌던 '신데렐라' 이야기는 서로의 선한 영향력으로 발전한 공주가 스스로를 구하는 식으로 조금씩 진화해 나가며 2000년대 후반까지 그 모습을 달리해 영화와 드라마로 계속해서 만들어지다가 최근 들어 뜸해지고 있다. 이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지금의 소녀들에게 더 이상 판타지를 주지 못한다는 반증 아닐까? 오늘의 젠더 의식으로 <귀여운 여인>을 감상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있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지난 30년간 무엇이 변했고 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영화 <귀여운 여인>의 한 장면ⓒ Buena Vista Pictures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의 존재감은 보는 사람 모두를 자기편으로 만들 만큼 빛을 발하며, 부족한 개연성마저 채워 버린다. 그녀의 밝고 건강한 이미지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아메리칸 스윗허트로서의 자격을 충족시키고, 이후 계속된 성공은 그녀를 신뢰감(투자자에게는 흥행이라는, 관객에게는 재미라는)을 주는 배우로 성장시킨다.

1990년 <귀여운 여인>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그녀는 10년 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로 2001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 정점을 찍는다. 이 두 영화가 아마도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품들일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속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은 서로 상반된 캐릭터로, <귀여운 여인>의 비비안이 수동적인 인물인 반면 <에린 브로코비치>의 에린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인데 두 작품 사이 겨우 십 년의 세월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만약 줄리아 로버츠가 2018년 신인 배우이고 <귀여운 여인> 출연을 제안 받았다면 그녀는 승낙했을까?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2018년에 <귀여운 여인>이 영화로 만들어 질 일은 없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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