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면 스르륵 귀신처럼 일어나 멍을 반 시간 때리다, 여기저기서 청탁받은 잡다한 글을 쓴다. 쓰디쓴 사약 같은 커피를 보약처럼 들이키며 미처 깨지 않은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운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갈등이 시작된다. 젖은 스펀지처럼 처지는 몸뚱이를 잠깐 뉘일까 그냥 바람이라도 쐴 겸 조조 영화를 보러 갈까.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친구로부터 간밤에 온 문자 한 통. "롯데 시네마 아홉시 십분." 시계를 보니 여덟시 반. 눈곱만 떼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

갱년기 불면증에 밤을 꼬박 새우고 나왔다는 친구도 모자에 마스크로 무장, 눈만 내놓고 나왔다. 제목이 <미쓰백>이라는데 너무 이른 시간 때문인지 관객이 우리 둘뿐이다. 무슨 영화냐고 물었더니 친구의 대답. "몰라, 제일 빠른 시간이기에 나오라 한 거야. 잠도 안 오고." '쿨내' 진동. 친구와 나는 주로 이렇게 영화를 자주 본다. 하도 많은 영화를 시도 때도 없이 보기에 굳이 무슨 영화인지 찾아보지도 않는다. 실망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모르고 봐야 '꿀잼'.
   
 영화 <미쓰백>

영화 <미쓰백> 포스터.ⓒ (주)리틀빅픽처스

 
영화 시작 몇 분 만에 무슨 내용인지 감이 왔다. 그리고 곧 손에서 땀이 났다. <미쓰백>은 실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아동학대를 다루고 있다. 학대의 상처를 가지고 자라 어른이 된 '미쓰백' 백상아(한지민 분)가 학대받는 아이 지은(김시아 분)을 만나고, 그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화다. 주인공인 한지민의 연기도 좋았지만 진짜 내 손에 땀이 나게 만든 배우는 아이를 학대하는 지은이 친부의 내연녀 주미경(권소현 분)이었다. 메소드 연기란 이런 것. 단 한순간도 그녀가 나오는 장면은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영화로 '분노 유발자'란 별명을 얻었다는 권소현의 연기는 소름 그 자체다.

상아는 한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얇은 옷을 입은 지은을 발견한다. 조그만 몸이 상처투성인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상아는 아이에게 먹을 것과 따뜻한 옷을 사서 입힌다. 밤이 되어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데 아이의 아빠가 다짜고짜 아이를 걷어차며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소릴 지른다. 놀란 상아는 달려가 아이 아빠를 밀치며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데, 이때 너저분한 거실 한 가운데서 족발에 소주를 마시고 있던 주미경이 조용히 그러나 소름 끼치게 말한다. "지금 뭐해요?"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속으로 대답했다. "죄...죄송해요."
 
 영화 <미쓰백> 스틸 사진.

영화 <미쓰백> 스틸 사진.ⓒ (주)리틀빅픽처스

 
이어서 주미경은 눈 흰자를 희번덕이며 상아에게 "개 한 마리라도 키워 봤냐"고 윽박지르는데 나는 저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나약한 인간 같으니라고. 불의를 보면 맞서 싸워야 하는데 영화를 보고도 '벌벌'이라니. 세상 겁쟁이인 내 자신이 한심했다. 옆에 앉은 친구가 갑자기 "미친 X" 욕을 했다. 아... 사이다. 뭔가 든든한 느낌. 갱년기 친구가 나 대신 불의에 대항해 주겠구나 생각하니 나도 주먹이 쥐어졌다. 주도는 못해도 도움은 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

주미경이란 캐릭터는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사랑이 충만한 표정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상냥한 얼굴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 너무나 평범한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 집에만 들어가면 갑자기 악마로 돌변한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무능한 남자친구 때문이라면 헤어지면 그만인데.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남자와 살면서 그 남자의 딸을 학대하는 이유가 '몸정'이란다. 같이 살면서 몸으로 부대끼며 생겼다는 몸정, 때리다 보니 생겼다는 몸정 말이다. 그녀의 표정과 이 단어, 그리고 말투까지 합쳐지니 '섬뜩 몸정 3종 세트'가 완성되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 친구가 말했다. "오늘도 편히 자기는 틀렸네. 막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 여자 누군지 알아? 진짜 꿈에 나타날까 무섭네." 웬만하면 연기려니 하고 외려 연기 칭찬을 할 테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엄청난 몰입감에 꼴도 보기 싫은 여자가 배우 권소현이다.

이 후덜덜한 배우 권소현은 2015년 <마돈나>란 영화에서 마돈나(미나) 역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되었고 이 영화로 '한국 영화평론가 협회상' 신인 여우상을 받은 실력파 배우다. 그것도 첫 영화의 첫 주연급 조연으로 말이다.

내게 <마돈나>란 영화는 한 마디로 평하기 매우 곤란하다. 심기가 불편해지는 영화, 잔상이 많이 남는 영화, 마음이 아픈 영화의 집합체이다. 이 모든 감정들의 끝에는 미나로 분한 권소현이란 배우가 있다. 외로움과 소외감을 허기로 채우는 가난한 미나는 그런 이유로 폭식을 하는 뚱뚱한 캐릭터다. 그녀는 이 역할을 위해 70킬로그램까지 살을 찌웠다. 이 역할에 모든 걸 다 던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만삭의 몸으로 창녀촌에서 손님을 받아야 하는 미나는 너무도 처참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권소현은 이런 캐릭터를 놀랍게도 완벽하게 소화했다.
   
 영화 <마돈나> 스틸 사진.

영화 <마돈나> 스틸 사진.ⓒ 리틀빅픽처스

 
올해 <암수살인>이란 영화에서 피해자 오지희 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미쓰백>이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로 다시 한번 '한국 영화 평론가 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차지했다. 그녀의 수상소감이 인상적이다. (울먹이며) "저는 자세히 보아야 쪼끔은 예쁜 배우인 것 같습니다. (중략) 오래 보아서 사랑스러울 수 있는 배우가 되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외모가 예쁘지 않다고 느꼈나 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가지는 강력한 극복의 열정이 그녀에게 넘친다. <마돈나> 때에 찌운 살을 <미쓰백> 때엔 열흘 동안 무려 15kg이나 감량했다고 한다. 놀랍다. 1kg 빼기도 힘든데.

그녀는 연극무대는 물론 <뷰티풀 게임><헤어 스프레이><그리스><노래하는 샤일록> 등 뮤지컬도 여러 편에 출연했다. 특히 <헤어 스프레이>로는 '제4회 대구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받았다. 노래보다는 춤이 특기라는 그녀는 말 그대로 다재다능하다. 배우 권소현은 자세히 보면 예쁠 뿐만 아니라 충분히 넘치게 매력적이다. 이제 고작 작품 3개로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녀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나도 <미쓰백>을 보며 '벌벌' 떨면서 그녀와 '몸정'이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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