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다영씨> 메인 포스터.

영화 <다영씨> 메인 포스터.ⓒ 인디스토리


01.

처음의 무성영화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인력으로 영사기가 돌아가는 동안, 관객들은 문자 그대로 영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더 발전한 단계가 영상 밖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판소리에서 고수가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영상에 적합한 의성어, 의태어를 내거나 간단한 흉내를 내어 영상에 소리를 입혔다. 마지막에는 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클래식 음악이 곁들여지거나 배우들이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무성 영화 시대의 마지막 작품들은 '무성'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무성 영화는 대체적으로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반에 성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02.

고봉수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다영씨>는 흑백의 무성 영화라는 최근 보기 드문 형식을 가져다 입힌 작품이다. 흑백과 무성, 두 가지 모두 이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형식인데, 한 작품에 모두 가져다 입혔다. 물론, 무성 영화 시대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흑백이었다는 점에서 두 가지 형식은 분리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1950년대까지의 상업 영화 대부분은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흑백과 무성 사이에서 무성의 측면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싶다. 작년 이맘때 개봉했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와 같이 종종 시도되었던 흑백 영화 장르와는 달리, 무성 영화는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2015년 개봉했던 <트라이브>라는 우크라이나 작품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국내에서의 제작은커녕 만나보기조차 어렵다는 뜻이다.

무성 영화라고 해서 러닝타임 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작품은 무성 영화 시대의 마지막에 속하는 작품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 연주로 채워진다. 아주 가끔씩 행동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의성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공식적인 러닝타임 61분 내내 들리는 것은 그 뿐이다. 이러한 형식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겠으나,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무성 영화의 특성 상, 어려운 내용을 담을 수도 없거니와, 소리 이외의 자극을 통해 수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영화 <다영씨> 스틸컷

영화 <다영씨> 스틸컷ⓒ 인디스토리


03.

영화 <다영씨>의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간단하다. 퀵서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민재(신민재 분)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의 삼진 물산이라는 회사에 근무하는 다영(이호정 분)을 짝사랑한다는 내용. 회사 안에서 외톨이로 지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남몰래 그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퀵서비스를 그만두고 그 회사에 입사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담아냈다.

그 전에, 이 작품을 연출한 고봉수 감독의 시선이 위치하는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장편 영화였던 <델타 보이즈>에서도, 두 번째 작품인 <튼튼이의 모험>에서도,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언제나 '루저'들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그가 그려내는 루저들은 애잔할지언정 비겁하지는 않다. 그 속이 맑다 못해서 투명하게 들여다 보일 정도다. 인물에 따라 그런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고 하기도, 제 속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모두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다영씨를 사랑하는 민재 역시 그런 인물이다.

04.

무성 영화는 대체적으로 과장된 행동과 표정으로 인물과 상황을 표현한다. 무성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르가 코미디다. 그 중에서도 찰리 채플린을 최고로 꼽는 까닭은 그런 부분들을 잘 이해하고 표현해 낼 줄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과장된 웃음을 통해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로까지 인정받았다. 해학이다. 이 작품에서 많은 부분이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상에 지쳐 잠든 다영씨가 조금 더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사무실 환경을 조성하는 민재의 모습이 대표적인 부분이다. 그녀의 편안한 숙면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는 소머즈 이상의 청각을 보여주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이 깜박거리고 있는 눈꺼풀의 소리까지 거슬려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사가 없는 와중에도 민재가 다영을 얼마나 위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요소들임과 동시에, 그녀 앞에 직접 서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그의 모습과 대비하여 애잔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다영을 대하는 사무실 내의 남자 직원들의 과한 표정과 누가 봐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다영과 하람(강하람 분)에 대한 차별적 대우 역시 과장되어 표현된다. 그것만으로도 영화가 요구하는 오락적 요소는 충족시킬 수 있지만, 이 장면들을 통해 회사 내에서 다영이 겪는 여러 부조리함이 드러나면서 해학적 표현으로까지 작용하게 된다.
 
 영화 <다영씨> 스틸컷

영화 <다영씨> 스틸컷ⓒ 인디스토리


05.

이 작품의 해학적 요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크게 두 부분이다. 민재가 퀵서비스 기사로 일을 하던 시기의 직업적 대우에 관한 것과 다영이 사무실 내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불공평함에 관한 것. 민재에게는 퀵서비스 종사자를 마치 자신의 하인을 부리듯 부리거나,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고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들이 주어진다. 시간에 쫓겨 보름달 빵과 바나나 우유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다영이 직면하는 문제는 조금 더 잔혹하다. 회사 내에 소위 빽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업무를 지시 받는다.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두 가지 모두에 있어 표현되는 방식이 '해학적이다'라고 표현한 까닭은 이런 장면에 대해 감독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 비판이나 비난 이전에, 문제만을 드러내놓고 그 현상 속에 위치한 대상에 대해 호감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관객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민재와 다영의 문제는 현실 속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기에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06.

영화의 타이틀이 '다영씨'이기에 그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세 글자는 화자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마음일 뿐이다. 숨겨진 진짜 화자는 그녀의 이름을 토해내는 민재인 것이다. 그녀의 모든 장면은 민재를 통해 그려진다. 이로 인해 영화 <다영씨>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감성은 애잔함이 된다.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능력이 없는 이의 마음, 그 마음을 멀리 둘 줄 모르고 되려 더 깊이 끌어 안으려는 이의 모습이 그를 통해 보여진다. 어째서 그 애잔함의 티끌이 묻어버린 이의 삶은 점점 더 애잔함으로 차오르고 마는 것일까.

멀리서 연정이었던 민재의 사랑은 가까이 갈수록 연민이 된다. 사랑과 연민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의 몸부림은 타자의 무력함만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연민의 감정보다는 희미할지언정 사랑이 낫지 않겠나. 민재에게도 다영에게도.
 
 영화 <다영씨> 스틸컷

영화 <다영씨> 스틸컷ⓒ 인디스토리


07.

고봉수 감독은 '사단'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배우들과 단단한 관계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첫 작품에서 함께한 배우들이 계속해서 작품을 이어나가는 식인데, 심지어 두 번째 작품인 <튼튼이의 모험>은 배우들과 함께 십시일반 비용을 모아 제작비를 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중심 인물도 매번 달라진다. <델타 보이즈>에서는 배우 백승환이, <튼튼이의 모험>에서는 김충길 배우가, 이번 작품 <다영씨>에서는 신민재 배우가 중심에 서 있다. 물론, 누군가 한 명이 주연이 되어 극을 이끌어 나가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묵묵히 그 뒤를 받친다. (고성완, 윤지혜, 표성균 배우도 세 작품을 모두 함께한 배우들이다.) 지난 작품들에서의 합도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이번 작품에서야 말로 그 힘이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대사도 없고, 오직 행동과 표정만으로.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지난 시간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결코 이렇게 완벽한 모습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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