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국가부도의 날> 메인 포스터.

영화 <국가부도의 날> 메인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최국희 감독은 2년 전 볼링과 도박을 접목시킨 <스플릿>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 한때 잘나갔던 볼링 선수 철종(유지태 분)이 자폐 성향을 가진 천재 영훈(이다윗 분)과 파트너가 되어 인생을 건 볼링 도박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의 성장 드라마. 적은 예산에 짧은 회차로 제작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생각보다 힘이 있었다. 신인답지 않은 빠르고 노련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지난 1997년, 실제로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린 바 있었던 IMF 사태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최국희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OECD 가입은 물론 경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선전이 난무하며 역사상 최고의 경제 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던 때, 곳곳에서 감지되는 국가부도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스플릿>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은 극 속에 다양한 상황을 배치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깔끔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규모가 작은 작품으로 데뷔한 감독이 큰 작품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 스토리를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IMF 상황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지점의 면들을 명확히 캐치해 전달한다는 점이 이번 작품에서 최국희 감독이 보여주는 가장 돋보이는 장점이다.

02.

이번 작품 <국가부도의 날>은 영화적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 그 중에서도 실제로 상당히 가까운 시기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현실적 장치들을 배치하는 부분은 중요한 문제였다. 감독은 이 문제를 크게 두 가지, 당시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치를 배치하는 일과 당시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치를 구성하는 일로 구분하여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당시의 실제 TV 영상들은 물론, 영화 속 가판대의 신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시대적 상황이 전자의 부분, 국가부도의 날을 7일 앞둔 시점부터 시간적 흐름에 따라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환율과 국가보유고의 기입과 같은 부분은 후자의 것이다.

영화 속 정학(유아인 분)이 퇴사 이후 투자자들을 모아놓고 설명하는 대목 또한 당시의 대한민국이 경제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부분. 미국의 서브프라임 문제를 다룬 작품 <빅쇼트>에서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실링 분)이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분)에게 젠가(Jenga) 블록을 이용해 채권들의 신용 등급과 바운딩 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CJ엔터테인먼트


03.

사실 이 작품은 IMF 사태 그 자체를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이해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장면을 삽입하는 것에 그친다. 특히, 후반부의 IMF 실무자 회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간결하다. 사건 자체보다는 이 상황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인물과 이 상황에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 그리고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까지 하나의 상황으로 다양하게 파생될 수 있는 모습들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경제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어떻게든 상황을 돌려보려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과 상황 자체를 은폐하는 것에 급급하고 국가의 안정보다는 이를 자신의 기회로 돌리려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의 대립.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빚더미에 나앉게 되는 작은 공장의 사장 갑수(허준호 분)와 이 상황을 예측하고 사표를 던진 뒤 일확천금을 노리는 윤정학의 대비는 극을 이끌어 가는 뼈대가 된다.

04.

무엇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동인이 명확하게 설명된다는 것이 작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인물들 간의 비교와 대비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감독이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러닝타임 곳곳에서 발견된다.

초반부에서 현 상황을 설명하는 시현과 어음을 받고 계약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갑수의 모습이 빠르게 교차되며 표현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이 부분은 이번 작품의 편집 중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속도감을 잃지 않으면서 독립되어 있는 두 인물의 상황을 적절히 옮겨다 붙인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전체 러닝타임 내에서의 시현의 행동은 재정국 차관의 행동과 달리 당위성을 얻게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말이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시현과 갑수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도 상황을 나아지도록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인물로 묶인다던가, 재정국 차관과 정학이 현 상황을 자신의 미래에 이득이 되도록 이끌고 가려는 인물들로 유사한 결정을 내린다는 식이다. 한편, 시현과 재정국 차관은 동일한 상황 속에서 완전히 다른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인물로 그려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막대한 피해를 홀로 짊어지는 정사장(정규수 분)과 달리, 갑수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컷.ⓒ CJ엔터테인먼트


05.

'국민들의 금은 기업들의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라는 문구가 아프게 느껴진다. IMF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고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 결과적으로 원하던 미래를 선물 받은 이들은 상황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고자 했던 재정국 차관과 정학이었으니까. 여기에서 두 사람의 양심에 대한 문제는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믿음 하나로 밑바닥에서 겨우 살아남은 갑수 앞에서는 두 사람의 양심의 차이조차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속에서 정학이 투자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했던 말이 하나 떠오른다. '줄 여'에 '믿을 신', '여신(與信)'. 믿음을 준다는 말이다. 최국희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현재의 우리 나라를 과거에 투영시키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IMF 당시의 우리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처했던 것이 눈에 보이지 않던 믿음의 증발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그런 믿음 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이.

물론 그렇다고 희망의 작은 불씨까지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기로부터 건져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몫은 다 해냈다고 볼 수 있는 시현, 그녀와 닮은 아람(한지민 분)을 등장시키는 걸 보면 말이다. 자신의 옛날 모습이 투영되는 듯한 아람의 눈빛을 보며 시현도 이렇게 말한다. '두 번은 지고 싶지 않거든요.'

06.

IMF 외환 위기. 당시를 직접 겪은 세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것도 벌써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젊은 세대 가운데는 IMF라는 단어를 말로만 들었지 그 때의 상황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 작품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에 소구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를 지나온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기억이기에, 또한 직접 겪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간접적 체험을 통한 이해가 가능한 작품이기 때문에 말이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적 허구로 형성된 이야기는 충분히 즐기면서도 이 작품을 통해 그 시절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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