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에서 수비 전문선수 리베로는 세터와 함께 가장 보수적인 포지션이다. 한 번 주전으로 낙점되면 수 년 동안 자리가 바뀌는 법이 없다. 공을 쫓아 수 없이 몸을 날리지만 공격수들처럼 수직점프를 할 일이 많지 않아 부상을 당할 확률도 상대적으로 낮다. '미친 디그' 김해란(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이 2014-2015 시즌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지만 이는 수비를 하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올스타전에서 백어택을 시도하다 다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리베로들은 프로 입단 초기부터 주전 리베로로 활약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남자부에서는 오재성(상무신협)이나 부용찬(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같은 상위라운드 출신이 종종 있지만 여자부는 좀처럼 상위라운드 출신의 리베로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해란이나 임명옥(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오지영(KGC인삼공사)처럼 공격수에서 리베로로 전향한 케이스가 더 많다.

IBK기업은행 알토스의 박상미 리베로 역시 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1라운드(전체7순위)로 지명됐을 정도로 크게 주목 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박상미는 입단 초기에는 임명옥, 2015-2016 시즌부터는 김해란의 그늘에 가려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지난 5월 기업은행으로 이적한 박상미는 이번 시즌 주전 리베로 한지현의 부상을 틈 타 프로 데뷔 7시즌 만에 드디어 주전으로 활약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남지연 리베로 영입 후 신흥명문으로 자리 잡은 기업은행
 
 박상미는 6시즌 동안 인삼공사의 백업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기업은행으로 트레이드됐다.

박상미는 6시즌 동안 인삼공사의 백업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기업은행으로 트레이드됐다.ⓒ 한국배구연맹

 
201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여고배구의 양대산맥 김희진과 박정아(도로공사)를 모두 지명하며 창단한 기업은행은 처음 리그에 참가한 2011-2012 시즌까지만 해도 팀 전력이 정비되지 않았다.첫 시즌을 앞두고 중앙공격수 지정희와 살림꾼 박경낭, 세터 이효희(도로공사)를 영입하면서 공격수의 구색은 갖췄지만 역시 문제는 수비를 책임질 리베로였다. 

이정철 감독은 기업은행의 창단 멤버로 입단한 중앙여고 출신의 김민주에게 리베로 자리를 맡겼지만 프로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 감당하기에 리베로는 결코 만만한 포지션이 아니었다. 결국 2011-2012 시즌 기업은행의 수비는 김민주 리베로보다는 경험이 많은 박경낭이 이끌었고 2011-2012 시즌을 4위로 마친 기업은행은 리베로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기업은행은 2012년 6월 김언혜와 이나연, 김지수를 내주는 대가로 GS칼텍스 KIXX로부터 국가대표 리베로 남지연(기업은행 코치)을 영입했다. 기업은행 이적 당시에도 이미 김해란과 함께 V리그 여자부를 대표하는 리베로로 이름을 날리던 남지연은 이적 첫 시즌부터 수비상을 받으며 기업은행을 챔프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기업은행은 남지연 이적 후 5번의 시즌에서 3번의 챔프전 우승을 차지하며 V리그 여자부의 신흥 명문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2016-2017 시즌이 끝난 후 사상 최대 규모의 FA시장이 열리면서 토종 에이스 박정아가 도로공사로 이적했다. 전력보강의 필요성을 느낀 기업은행은 흥국생명에서 FA로 풀린 센터 김수지를 영입하면서 남지연 리베로를 보호 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다. 이미 김해란 리베로를 영입하고 기존의 한지현 리베로까지 거느리고 있는 흥국생명에서 굳이 남지연 리베로를 보상선수로 지명할 리는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기업은행이 우려했던 '설마'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흥국생명에서 김수지에 대한 FA 보상 선수로 남지연 리베로를 지명한 것이다. 이는 기업은행과 흥국생명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다 할 주전 리베로 없이 김혜선 리베로와 노란 리베로(인삼공사)를 번갈아 기용한 기업은행은 챔프전에서 도로공사에게 패하며 연속 우승이 좌절됐다. 남지연과 한지현 리베로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 흥국생명 역시 2017-2018 시즌 최하위로 추락했다.

한지현 부상으로 얻은 기회, 3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
 
 코트에서 표정이 다양한 박상미는 이번 시즌 기업은행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고 있다.

코트에서 표정이 다양한 박상미는 이번 시즌 기업은행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도 하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지난 시즌이 끝난 후 리베로 보강이 절실했던 기업은행은 노란 리베로와 7500만 원에 재계약했고 흥국생명에서 자리를 잃고 FA 자격을 얻은 한지현 리베로를 8000만 원에 영입했다. 하지만 또 한 명의 내부 FA 김미연(흥국생명)이 팀을 떠나면서 윙스파이커 자리에 구멍이 뚫렸다. 결국 기업은행은 2015-2016 시즌을 끝으로 배구계를 떠나 있던 백목화를 설득해 인삼공사와 사인앤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기업은행은 노란 리베로와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인삼공사에 내주면서 백목화와 박상미 리베로, 신인 드래프트 3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왔다. 인삼공사 입단 후 임명옥과 김해란, 오지영의 백업으로만 머물러 있던 박상미가 프로 입단 7년 만에 처음으로 팀을 옮기게 된 것이다. 물론 기업은행에서도 박상미에게 주어진 보직(?)은 한지현의 백업 리베로였다.

실제로 박상미는 컵대회부터 시즌 초반까지 한지현에게 주전 리베로 자리를 내준 채 후위 수비나 원포인트 서버로만 간간이 코트를 밟았다. 하지만 지난 12월 24일 현대건설 힐스테이트전을 앞두고 한지현이 허리 통증을 호소하면서 박상미가 깜짝 선발 출전했다. 그리고 박상미는 시즌 첫 선발 출전 경기에서 57.14%의 리시브 성공률과 18개의 디그를 기록하면서 한지현의 공백을 말끔히 지웠다. 

박상미는 팀이 1-3으로 패한 흥국생명전에서도 46.94%의 리시브 성공률과 16개의 디그를 기록하면서 제 몫을 해냈고 5일 GS칼텍스전에서도 깔끔한 수비로 기업은행의 3-0 승리에 공헌했다. 주전 리베로 한지현은 이번 시즌 부상 전까지 8경기에서 40.27%의 리시브 성공률과 세트당 4.2개의 디그를 기록했다. 반면에 박상미는 선발 출전한 3경기에서 49.5%의 리시브 성공률과 세트당 4.7개의 디그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성적만 보면 한지현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신장이 166cm에 불과한 박상미는 배구 선수로서는 매우 불리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V리그 여자부에서는 신장 170cm가 넘는 주전 리베로가 단2명(임명옥,오지영)에 불과할 정도로 단신 리베로가 적지 않다. 박상미가 리베로로 성공하기에 결코 불리한 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프로 입단 후 한 번도 마음껏 코트를 누빈 적 없는 박상미가 7연속 챔프전 진출을 노리는 기업은행의 주전 리베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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