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작품 포스터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작품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제국주의 시대의 화려함을 바탕으로 환경과 여성을 비롯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담론을 말한다. 영화는 '인간 동물원'에서 '인간'역으로 전시 중인 소녀 '딜릴리(프루넬 샤를 암브롱)'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하는데, 이후 오렐(엔조 라트시토)이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카메라는 서서히 줌 아웃된다.

그러자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는 건 그녀가 정말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소년 오렐에게 일이 끝나고 4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그 후 카나키 원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듯하던 이야기는 딜릴리와 오렐의 대화를 통해서 산산조각이 난다. 파리의 주류 인종이 아닌 딜릴리가 적어도 평범하기만 할 것이라는 오렐의 상상은 그녀를 데리러 온 고급 마차를 통해 깨진다. 

초반에 제시된 오프닝 쇼트만을 보면 전형적인 청춘 로맨스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딜릴리는 피가 섞였다는 점에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 즉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오렐은 현대(당대 기준으로)의 파리에 살면서도 노동자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수혜를 다 받지 못한다.

고향에서 섞인 피로 차별받던 딜릴리는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 귀족 부인 엠마 칼베(나탈리 드세이)의 호의를 얻고, 그녀가 사는 파리에의 고급 저택에서 함께 머물게 된다. 딜릴리는 귀족 부인으로부터 귀족들의 예법을 배우고 파리의 문화를 배운다. 이때 딜릴리는 (파리의 시각에서는) 문화적인 원시성을 벗어던지고 현대인으로 거듭난다.

복장은 화려하고 마차는 고급지니 그녀를 고상한 현대 파리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건 단지 피부색뿐이다. 하지만 주인공 오렐을 비롯해서 파리의 인물들은 그녀의 피부색을 신경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겉으로 구별되는 원시성인 피부색은 영화 초반의 '인간 동물원'이 말하던 것과는 다르게 중요한 지점은 아니다.

영화에서 딜릴리의 피부색을 문제 삼는 건 귀족 부인의 운전수밖에 없다. 그는 딜릴리를 '고급진 옷을 입은 원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약간의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였을 뿐, 악역이었던 운전수가 죄를 회개하고 납치된 딜릴리를 구하러 갈 땐 이미 인종차별은 느끼기 어렵다. 인종차별을 다루는 것처럼 시작됐지만 명확한 결론은 짓지 않은 셈이다.

영화 속의 악역 단체 '마스터맨'은 그녀를 찾아다니며 인상착의로 거무튀튀한 피부색을 거론한다. 그건 그저 용모에 관한 것일 뿐 인종차별의 뜻을 담은 발언은 아니다. 오히려 상류층 파리 시민들의 피부색과 반대되는 하층민들의 피부색이 딜릴리의 그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피부색과 그에 따른 함의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영화 <파리의 딜릴리>의 한 장면ⓒ 부산국제영화제

  
계급적인 문제 혹은 인종적인 문제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딜릴리의 피부색은 프랑스인보다는 까맣고 카나키인 보다는 하얗다는 점에서 모호하다. 그런 딜릴리의 피부색은 영화 중간에 오렐과 딜릴리가 거쳐 가는 파리의 빈민촌에 거주하는 이들의 피부색과 유사하게 묘사된다. 그들은 씻지 못하거나 태양 아래에서 노동하는 탓에 피부가 하얗지 않고 새까맣다. 당대 산업혁명의 아이콘이 석탄이라는 점에서 숯검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하얀 피부를 가진 고고한 파리의 이면에는 검은 눈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딜릴리의 고향인 카나키가 프랑스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는 점과 그녀와 노동자들의 피부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피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딜릴리와 노동자들은 당대 프랑스 제국주의의 피해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영화에서 검은 피부색이란 계급적인 우위에 상관없이 제국주의의 나쁜 면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제국주의의 수혜를 어떻게 입었든 간에, 그것이 제국주의가 낳은 나쁜 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딜릴리가 귀족 부인의 품에서 자라고 있지만 결국에는 고향으로부터 도피해온 것이듯 말이다. 

영화에는 여러 유명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피부가 하얗다. 의사인 파스퇴르, 음악가 드뷔시, 건축가 에펠, 소설가 마담 프루스트 등. 이들이 하얀 피부를 지닌 게 그들의 명성이 고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단순한 생각일까? 제국주의의 시대의 아름다운 파리가 각종 식민지와 국내의 노동자들로부터 수혜를 입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연관성이 아예 없다고 보긴 어렵다.

극중 유명인들은 대다수 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성악가와 작곡가, 조각가와 건축가 등. 이들은 하얀 피부에 더해서 검은 정장과 말끔한 복장을 하고 있고 그 중 유명한 이는 뒤에서 후광까지 비친다. 반면 작중에 등장하는 빈민촌의 사람들의 행색은 꼬질꼬질하다. 또한 반정부 단체인 '마스터맨'의 조직원도 대다수가 하층민을 영입해서인지 그다지 행색이 좋지는 않다.

이 이분법은 엄밀하게 말해서 굉장히 허술하다. 파리의 빛이 예술이고 파리의 어둠이 노동이라면, 노동하면서도 예술을 즐기는 배달부 오렐은 둘 중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까. 또는 반대로 검은 피부를 지녔으면서도 노동하지 않는 딜릴리의 모습은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까. 딜릴리가 노동을 피해 도망쳐왔으니 그래서 피부가 옅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럴 듯 해보이나 합당하지는 않다.

만약 위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흔한 로맨스였다면, 오렐이 딜릴리를 구원하는 결말으로 이어질 법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식의 구도로 짜여 있지도 않다. 오렐이 자신과 친한 여러 예술가에게 딜릴리를 소개하기는 하지만, 오렐은 오렐이고 딜릴리는 딜릴리일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맥을 통해서 문제의 근원에 차분히 접근한다. 

어쩌면 사회적 위치가 낮은 노동자 오렐과 인종적인 위치가 낮은 원주민 딜릴리는 그 계급적 구도의 유사점을 목격하고는 서로 친밀해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렐은 배달부이지만 예술적으로 박식하고 귀티가 나는 파리 사회의 일원이다. 딜릴리는 귀족이지만 예술적으로 보다 아쉽고 원주민의 피를 받아 파리 사회의 근본적인 일원은 아니다. 두 사람의 지위가 어떤 방식으로 정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화합과 우정을 보면서 이 파리가 보이는 것처럼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현대의 관객이 과거의 파리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역사 체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구에선 본 달처럼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지 않는 월광일 것이며, 때로는 아름다움보다 그 뒤의 진실이 더 고플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런 맥락에서는 이 영화의 피부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종 문제를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됐든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파리 사회의 어둠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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