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 끼고 사는 여자, '이끼녀' 리뷰입니다. 바쁜 일상 속, 이어폰을 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여백이 생깁니다. 이 글들이 당신에게 짧은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tvN 드라마 <남자친구>를 보는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

"말레콘 비치 석양은 이 음악이랑 같이 들어야 200% 감동입니다."

쿠바의 석양 앞에 앉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여자에게 남자는 이어폰을 건넨다. 귀에 이어폰을 꽂는 순간, 석양과 음악은 2인 1조가 되어 여자의 기억 속에 잊지 못할 광경을 아로새긴다. 여행지의 압도적 대자연 앞에서 귀마저 열고서 음악을 들어본 사람은 이 기분 알 것이다. 아마 여자는 일상으로 돌아가 그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말레콘 비치의 석양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풍경과 음악이 만들어 내는 마법이니까.
 
남자친구 <남자친구>의 한 장면

▲ 남자친구<남자친구>의 한 장면ⓒ tvN


겨울이다. 눈의 풍경이 우릴 찾아올 것이고, 얼마 전 늦잠을 자느라 첫눈을 놓친 나에게도 두 번째 눈은 찾아올 것이다. 그땐 음악을 들어야지. 말레콘 비치에 어울리는 노래를 듣던 그들처럼 나도 눈의 세상을 만나면 음악을 꼭 함께 들어야지. 사려 깊은 손길로 이어폰을 건네줄 박보검이 없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손으로 선곡해서 듣는 게 어쩌면 눈 내리는 쓸쓸한 풍경과 잘 어울리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그 날을 위해 두 곡을 준비해뒀다. 자이언티의 '눈'과 정승환의 '눈사람'. 눈과 눈사람이라니 왠지 모르게 잘 이어지면서 온통 눈밖에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 자이언티의 '눈'은 작년 12월에, 정승환의 '눈사람'은 올해 2월에 발표됐다. 가장 가까운 겨울에 나온 노래라서 두 곡을 선곡한 건 아니다. 눈을 소재로 한 명곡이 공교롭게도 지난겨울 한꺼번에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곡은 내게 '그냥' 좋은 곡이다.

두 곡이 좋은 건 눈의 정서가 진하게 담겨있어서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포근한데 시리고, 아름다운데 쓸쓸하고, 행복한데 서글픈 상반된 감정이 함께 일어난다. 그 묘한 기분이 '눈'과 '눈사람'의 멜로디와 가사에 마법처럼 표현돼 있다.        
 
눈 자이언티 '눈'

▲ 눈자이언티 '눈'ⓒ 더블랙레이블

 
 "내일 아침 하얀 눈이 쌓여 있었으면 해요/ 그럼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드릴게요/ 계속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요/ 약속해요

눈이 올까요 우리 자는 동안에/ 눈이 올까요 그대 감은 눈 위에/ 눈이 올까요 아침 커튼을 열면 눈이 올까요" (자이언티, 눈(feat.이문세) 가사 중)


자이언티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이문세의 피처링으로 편안함이 배가됐다. 무엇보다 이 노래는 가사가 근사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밖에 눈이 와 있다면 당신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은 참 따뜻하다. 문득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올랐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눈이 내려서 나타샤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리는 것. 이게 사랑의 모습이다. 세상의 인과법칙마저도 그 사랑에서부터 비롯되게 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시작이게 하는 것. 눈이 내리면 차를 내려주겠다는 가사도 무언가 묘하게 인과관계가 부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사랑의 진실함이 묻어난다. 눈이 안 와도 차를 마실 수 있지만 눈이 오면 마실 수 있다는 룰이 생기면서 낭만적 언약이 만들어졌다.
 
눈사람 정승환 '눈사람'

▲ 눈사람정승환 '눈사람'ⓒ 안테나


정승환의 노래 '눈사람'도 가사가 좋다. 나는 다음의 두 구절이 와 닿았다.

"아무 노력 말아요/ 버거울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잊어요"

"시간이 걸려도/ 그대 반드시 행복해지세요" (정승환, '눈사람' 가사 중)


이 가사를 보면 '내 욕심'은 먼지만큼도 없다. 오직 사랑하는 상대가 더 이상 마음 버겁지 않고 불행하지 않기만을 온 마음 다해 바랄 뿐이다. '버거울 땐 언제든 나의 이름을 잊어요'란 부분이 특히 짠하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일을 그럭저럭 괜찮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이 곡의 주인공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힘들면 나의 이름을 잊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혼자 서 있는 눈사람처럼 외로운 가사다.

이 노래는 아이유가 작사하고 제휘가 작곡했다. 아이유의 곡 '밤편지'의 작사, 작곡과 똑같은 조합이어서 그런지 따스하면서도 동시에 가슴 시린 감성이 배어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은, 만약 그 눈사람의 두 눈이 웃고 있다면 그것은 기쁨의 상징일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눈사람은 '기다리는' 존재다. 깔깔깔 활발하게 떠들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서 있는 존재. 혼자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게 눈사람의 이미지다. 그런 눈사람의 모습이 정승환의 곡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듣고 있으면 안쓰러움에 아득해진다.

"멀리 배웅하던 길/ 여전히 나는 그곳에 서서/ 그대가 사랑한/ 이 계절의 오고 감을 봅니다"

"몹시 사랑한 날들/ 영원히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노랫말처럼 눈사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영원만큼 긴 시간을 견뎌내는 사람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눈사람 때문에 우리의 겨울은 따뜻하고,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눈사람 때문에 겨울은 또한 쓸쓸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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