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누군가 물었다. 올해 가장 슬펐던 때가 언제냐고. 어쩌다 그런 질문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답하기가 매우 어려운 물음이었다는 점은 확실했다. 슬픈 순간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많아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슬픔들은 모두 평범했다. 어느 순간 하나가 특별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만한 일이 있어서,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슬픔은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나를 떠났다. 아무 것도 남기는 것 없이. 그런 일과 같다. 아침에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나는 다소 경사진 언덕을 걸었다. 그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올라가 언덕을 넘어서면 가쁜 숨이 올라왔다.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증에 냉수를 들이키듯 마셨다. 슬픔에 잠겼다 빠져나오는 일이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아침 출근길을 걷듯이 그저 반복된다.
 
가슴에 슬픔을 안고 생활하는 것은 커다란 납덩어리를 품는 것과 같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깊은 물속에 잠긴 느낌이다. 하지만 그 몸을 이끌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러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처음에는 견딜 만하다 나중에는 피곤하다가 다리가 아픈 게 서러워서 울다가 결국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두 다리가 무감각해지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슬픔을 통과한다는 게 그렇다. 구렁텅이에 빠졌다 온몸에 진흙을 얹고 기어가듯 걸어가는 일이고 이건 그저 지치고 피곤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감정의 기본 값이 행복인지 무던함인지 슬픔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가사를 이해하자 도리어 질문을 하게 된 노래
 
언제가 가장 슬펐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 날, 술에 잔뜩 취해있던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방황하듯이 반복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말은 단지 뭐라 답할지 모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고 있을지. 3년 전 했던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행복이란 어떤 의미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깊은 바다 속을 거닐다가 잠시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오는 것과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대부분 깊은 물에 잠긴 듯 살지만 공기를 아예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그래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고. 나에게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나름 멋진 답을 했다고 우쭐대고 있었는데 사실은 틀린 답이었다. 감정은 물속을 들어왔다 나오는 것처럼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된다면 애초에 심해에 잠기는 인생을 누가 살고 싶겠나. 내가 느낄 감정을 예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질문하게 된다. 잘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어린 나이에 뜻도 모르고 들었다가 나이를 먹고 가사를 이해하고 공감을 하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가사를 이해하고 나서야 질문을 시작하게 되는 곡도 있다. 내게는 '눈부신 세상'이 그런 노래였다. 원래는 조동진이 부른 이 노래를 나는 장필순이 리메이크한 버전으로 처음 만났다. 나중에서야 조동진이 불렀던 원곡도 찾아들었다. 보통 이런 경우 다시 불린 노래가 원곡을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노래는 달랐다. 조동진이 부른 것도, 다시 편곡되어 장필순이 부른 노래도 각자의 고유한 매력이 있었다. 분명 같은 곡이지만 비교가 불가능했다. 때로 나는 두 버전의 '눈부신 세상'을 나란히 재생 목록에 놓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한다. 그 만큼 사랑하는 노래다.
  
 조동진의 '눈부신 세상' 앨범 표지(좌), 장필순의 '눈부신 세상' 앨범 표지(우)

조동진의 '눈부신 세상' 앨범 표지(좌), 장필순의 '눈부신 세상' 앨범 표지(우)ⓒ 조동진/장필순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 눈부신 세상
 
하지만 그렇게 사랑함에도 나는 도무지 노래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 곡의 화자는 자기가 태어나 사랑한 이 세상이 눈부신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곳이 어떤 곳인가. 가사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행복은 눈이 멀었고 꿈은 벗겨졌다. 그러면 행복은 우리를 찾아올 수 없고 꿈은 벗겨졌기에 세상이 초라함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눈이 부신가? 그리고 노래에는 이런 가사도 등장한다.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세상이 자기에게는 천국이라고 한다. 나는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 곳이 천국이에요? 어떻게 거기서 행복할 수 있죠? 슬퍼도 울지를 못하고 가슴이 뜨거워도 어느 누구와 나누지 못하는데.
 
정말 의아했다. 사실 노래를 하는 사람과 나의 처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 슬퍼서 울 때, 가슴 속의 열기가 사랑이 될 때 그 감정은 해소가 되거나 의미 있는 무언가로 남긴다. 아마도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눈물을 터트리고 사랑을 하며 우리는 능동적으로 생을 이끌어 간다. 무언가를 만들고 무언가는 버리며. 그런데 그걸 못하면, 그야말로 삶을 그저 버티는 셈이 된다. 마치 추운 바람 속에서 온몸을 동여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풍파처럼 찾아오는 감정의 파고를 그저 견디기만 해야 한다. 망연자실하게 가만히. 그런데 그런 생을 사는 곳이 천국일 수 있을까? 어떻게?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에 부를 수 있는 노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가사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았다. 장필순의 또 다른 노래 '아름다운 이름'을 듣고 나서였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알고 있나요 삶이라는 것/ 버텨내고 이겨내며/ 붙잡고 싶은 그 이름',
'알고 있나요 삶이라는 것/ 언젠가는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갈 그 이름'

 
유한한 삶은 언젠가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속도만 다를 뿐 우리는 그 순간에 점점 가까워진다. 막연하게 멀리 있다가 언저리로 그리고 근처로 다가간다. 그런 때가 오면 마냥 버텨내고 이겨내는 삶도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까? 우리가 언젠가 흙 속으로 돌아감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오면 사는 게 버겁게 느껴지기 보다는 아쉬워질까? 아직은 막연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 다만 알게 된 것은 '눈부신 세상'과 '아름다운 이름'은 다른 듯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울지 못한 채 슬퍼해도 가슴의 열기가 사랑이 되지 못한다 해도 이를 느낄 수만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뜻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건 살아있기에 행복하고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사는 곳이 어디건 그 곳은 천국일 것이다. 세상은 빛나고 삶은 붙잡고 싶은 이름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두 노래에 온전히 공감하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그래 그런 삶도 사람도 있겠지.
  
 장필순의 '눈부신 세상' 공연 장면

장필순의 '눈부신 세상' 공연 장면ⓒ EBS 스페이스 공감 화면캡처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중학생 시절 내게 과외를 해주던 선생님은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자기는 이번 생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빨리 끝나고 무덤 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도대체 왜 10대 초반의 나를 붙들고 저런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때의 나는 '오래 살면 좋은 게 아닌가? 왜 저런 말을 하시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 선생님은 인생에는 크고 작은 풍파가 있었고, 그래서 한 번은 살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 내릴까 고민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내려왔다고 한다. 내게 선생님은 그저 모든 것을 감내하길 반복하며 멀고 먼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던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는 한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그 시절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나이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그 때의 선생님만큼 나이를 먹으면 빨리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게 될지, 아니면 지금처럼 생각하기를 유예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선 머리를 비우고 살아가고 있을지. 어느 쪽으로 간다한들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눈부신 세상을 말하고 삶을 붙잡고 싶어 하던 조동진과 장필순을 생각한다. 조금 더 걸음이 가벼워질 수 있음을, 조금 더 평안해질 수 있음을,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성숙해질 수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미 있음을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삶을 완강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도 않게 된다. 막연함은 사람을 불안하게도 만들지만 거꾸로 희망을 가지게도 만들지 않는가. 적어도 오늘은 후자를 선택하고 싶다. 조금 더 오래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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