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도의 날>.

<국가 부도의 날>.ⓒ 영화사 집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는 이른바 '미국 음모론'이 확산됐다. 흑심을 품은 미국이 한국 금융시장에 단기 자금을 투입했다가 일거에 빼가는 방법으로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떨어트려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IMF 구제금융 뒤로 고급 빌딩들이 미국인 손에 넘어가고 알짜 기업들이 미국 투자자에게 인수·합병되는 일들이 많았음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가 미국 기업의 침투가 용이한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에 '미국 음모론'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28일 개봉된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도 그와 관련된 장면이 나왔다. 이 영화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이 금융위기를 예언하고 이를 막고자 노력해보지만, 무책임한 정부 관료들의 훼방으로 좌절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 속으로 무기력하게 빨려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미국 정부가 한국과 IMF의 협상에 개입하는 장면이 나왔다. 서울에 도착해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IMF 협상단 후미를 미국 재무차관이 조용히 뒤따르는 장면이 묘사됐다. IMF 측과의 협상에 참여한 한시현 팀장이 이 모습을 포착하고 미국과 IMF의 결탁 사실을 비판하자, IMF 총재(뱅상 카셀 분)가 한시현을 협상팀에서 배제해달라고 한국 측에 요청하는 장면도 있었다.
 
영화 속의 협상은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마무리됐다. 미국 금융자본이 한국에서 활동하기에 유리한 여건들이 이 협상에서 관철됐다. 많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입력된 미국 음모론에 힘을 실어줄 만한 장면이다.
 
그런데 '미국 음모론'에 대해서는 그동안 반론들이 있었다. 미국이 한국을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직접적 주범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한국을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직접적 계기가 됐다고 알려진 외국인 주식 자금의 이동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고 한다. 장하성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은 2014년에 펴낸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 주식자금은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9월 이후 10월 한 달 동안 7.0%가 한국 주식시장을 떠났다. 11월에는 큰 변동이 없다가 12월부터는 외국인 주식 자금이 다시 주식시장으로 유입되기 시작해서, 12월부터는 9월 말보다 오히려 7.9%가 늘어났다."
 
경제학자 우석훈도 2006년 5월호 월간 <말>에 기고한 'IMF는 미국의 음모였을까'란 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미국인들이 외환위기를 일으켜 한국 부동산 가격을 떨어트린 뒤 서울 시내 알짜 빌딩들을 대거 매입했다는 풍문이 상당부분 과장됐다는 것이다.
 
"IMF 이후에 재벌들이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내놓은 부동산 급매물들에 대해서 외국 자본들은 그렇게 주워 먹듯이 매입하지는 않았고, 상당히 까다롭게 조건과 투자 여건 등을 고려해서 선별적으로 구매하였다. 많은 건물들이 임자를 결국 찾지 못했다. IMF가 값싸게 '바이(buy) 코리아'를 하기 위한 음모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국가 부도의 날>.

<국가 부도의 날>.ⓒ 영화사 집

  
하지만 미국이 한국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이 아니라고 해서, 미국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빨려들어간 직후부터 미국이 한국 경제를 훼방하면서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을 유도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인정된다.
 
동아시아가 1997년 외환위기로 빨려들어갈 당시, 한·일 양국과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 5개국 사이에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 논의가 있었다. 이 논의가 그대로 진행돼 AMF가 창설됐다면, 한국이 극도로 불리한 조건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는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IMF가 아니라 한국이 참여해 만든 AMF가 한국에 돈을 빌려주었다면, 외환위기를 틈타 미국 기업들이 한국 경제에 용이하게 침투하는 일도 쉽게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AMF 창설 논의를 무산시킨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 재무부는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국제금융국장에게 압력을 행사해 AMF 창설에서 발을 빼도록 했다. 한국이 IMF가 아닌 다른 기관에서 차관을 빌려 외환위기를 넘길 수 있는 길을 미국이 봉쇄한 것이다. 2002년 3월호 월간 <말>에 실린 'IMF 사태는 미국의 대(對)한국 경제전쟁'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기사는 폴 블루스타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징벌>(Chastening)이란 책을 근거로 했다.
 
"AMF 구상은 IMF 외의 국제통화기구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던 미국의 거센 반발로 좌초되었다. 폴 블루스타인 기자에 따르면, AMF 논의가 한·일 양국과 아세안 5개 국가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던 1997년 9월 14일 밤, 사카키바라 국장은 동경의 자택에서 국제전화를 받는다."
 
대장성 국장이 받은 이 국제전화는 AMF 창설을 무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압력을 전달하는 전화였다. 이 국제전화에 대해 폴 블루스타인 기자는 <징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래리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이었다. 그는 대화할 분위기가 아닐 정도로 화를 냈다. '나는 당신을 내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 서머스가 으르렁거렸다."
 
 <국가 부도의 날>.

<국가 부도의 날>.ⓒ 영화사 집

  
<국가 부도의 날>에서 한시현 팀장은 IMF 총재한테 '왜 미국 말을 듣고 협상을 하느냐?'는 취지로 대들었다. 실제로도 미국은 한국과 IMF의 협상에 끼어들었다. 영화에서처럼 IMF 협상단이 묵는 숙소에 미 재무차관 립튼도 여장을 풀었다. 위의 월간 <말>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립튼이 힐튼호텔 19층에 여장을 풀었을 때,  IMF 실무협상단과 한국측 대표들 간에는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치열한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립튼의 임무는, 한국 대표단에게 경제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 경우 구제금융은 지원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도 돕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국가 부도의 날>에서는 미국과 IMF의 호흡이 잘 맞았다는 점만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둘 사이에도 불협화음이 있었다. IMF가 생각지도 못한 조건을 립튼이 임의로 제시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 부도의 날>에서 보여준 것과 달리, IMF 실무진까지 미국에 반감을 품는 일이 있었다. 폴 블루스타인의 <징벌>에 이런 내용이 있다.
 
"IMF 실무단은 립튼의 의견 중 올바른 사안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많은 제안들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분개하기도 했다. (중략) IMF 측은 사실 한국에 대한 구조조정 압력엔 소극적이었다. 경제구조를 바꾸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이로울지 모르지만, 현재 한국을 엄습하고 있는 비상사태에는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 IMF 내 여러 부서엔 미국의 감추어진 의도에 대한 냉소가 팽배해 있었다."
 
<국가 부도의 날>에서는 IMF와 미국이 단합해서 한국을 골탕 먹인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IMF 측이 미국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미국이 이 협상에 깊이 개입해 한국의 경제적 조건을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IMF 위기'나 'IMF 사태' 같은 표현으로 부른다. IMF로부터 돈을 빌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꿔준 주체는 IMF라기보다는 미국에 가깝다. 그렇다면 '워싱턴 위기'나 '워싱턴 사태' 같은 표현으로 불러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미국의 역할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한국과 IMF의 협상에 개입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았다. 1997년 12월 3일에 IMF 협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요구조건은 계속 관철됐다. 12월 3일 협약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건들이 미국에 의해 추가됐던 것이다.
 
1997년 12월 17일 특별대사로 미국에 파견된 김기환과 래리 서머스 재무장관 간에 합의된 추가 협약은 'IMF 플러스'로 불린다. IMF와의 협약에 없었던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한국 기업에 대한 외국 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이 포함된 추가 협약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외환위기로 위태위태해진 한국을 녹다운시키고 이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빼낸다. 자국 영향권에 있는 IMF를 앞세워 한국 경제를 미국 기업의 침투가 용이한 상태로 바꿔놓은 것이다. 자국인들의 주식자금을 이용해 한국을 의도적으로 외환위기로 몰아넣었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구렁텅이에 빠진 한국의 다급한 처지를 악용해 경제적 이익을 취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