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
 
프랑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뜻은 이렇다. 재벌은 고사하고, 조물주 위의 건물주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속 의무는 얼마나 먼 우주와 같은 이야기인가.

이와 관련해, 박찬욱 감독은 "그러니까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이다"라며 묘한 감정을 토로한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4년 전,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가 세상에 나왔을 시절 영화주간지 <씨네21>과 한 인터뷰 중 일부다. 조금 길지만, 소개해 보면 이렇다.
  
 영화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이 31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 ⓒ 이정민

   
"예전의 가난했던 시절에 맨주먹으로 부를 이루던 때와 달리 부를 세습하면서 잘 교육받은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너가 좋고 젠틀하며 어려서부터 어려움 없이 자라니까 성격은 꼬인 데가 없다. 그러니까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이다.
 
반면 가난뱅이는 더욱 박탈감이 커지고, 가난해서 성격이 더 나빠지기 쉬운 세상이 됐다. 21세기를 생각한다는 무슨 모임에 나가게 된 적이 있는데 재벌 2세, 의사, 변호사 등의 내 또래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들 부드럽고 예의바를 수가 없었다. 겉으로만 내보이는 모습이랄 수도 있지만 속속들이 정말 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 얘기가 시작된 것 같다."
 
박 감독은 같은 내용을 지승호 작가의 인터뷰집 <영화, 감독을 말하다>에서도 토로한 바 있다. 박 감독은 "선입견이 완전히 무너졌다"며 "사람이 삐딱하다 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좋은 사람이라는 호감보다는 다 가진 놈들이 착하기까지 하구나 싶어 화가 나고 슬펐다"고 털어놨다. 그런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의 반대편에 자리한 '범인'들 때문이었으리라.
 
"그와 반대로 가난뱅이들은 욕망이 많은데 채워지지 않으니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미덕이 세습된다는 것. 그런 식으로 계급이 정착되고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그래봐야 상류사회의 매너나 교양을 얻을 수는 없다. 그건 나중에 다뤄봐야겠다, '너무 착해 미움 받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리, 몬스터> 속 '컷'이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능력 있고, 부유하고, 착하기까지 한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 영화감독(과 그의 아내)의 집에 침입하여 공격하는 가난한 아버지의 이야기. 바로 이 '컷' 속 아버지의 아이는 가난해서 더 슬픈 아이였고.
 
이 영화로부터, 박찬욱 감독이 한탄한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으로부터 14년 후인 2018년의 대한민국. 세습 받은 부를 영위 중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를 요구 받는 한국의 상류사회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 이상의 충격을 안겨준 10살 초등학생의 목소리
  
 미디어오늘 '조선일보 사주일가 운전기사 폭언 녹취록' 유튜브 동영상 캡처.

미디어오늘 '조선일보 사주일가 운전기사 폭언 녹취록' 유튜브 동영상 캡처. ⓒ 미디어오늘


녹취를 듣고는, 참담함이 먼저 엄습했다. 아니, 아찔했다. 10살 초등학생은 부모로부터, 평소 환경에서 도대체 무얼 보고 배웠길래 저런 험한 말을 태연히 내뱉을 수 있는 걸까.

어떡하면 자기 부모보다 나이가 많은 운전기사에게 몸에 밴 것 같은 소위 '갑질'을 일삼을 수 있었을까. 짐작하셨다시피,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이사의 손녀이자 방정오 < TV조선 > 대표이사 전무의 초등학생 딸이 50대 운전기사를 상대로 퍼부은 폭언과 막말 논란 말이다.
 
"아저씨는 장애인이야. 팔, 다리, 얼굴, 귀, 입, 특히 입하고 귀가 없는 장애인이라고. 미친 사람이야."
"아저씨 부모님이 아저씨를 잘못 가르쳤다. 어? 네 부모님이 네 모든 식구들이 널 잘못 가르쳤네."
"나 아저씨 보기 싫어 진짜로. 아저씨 죽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원이야."


지난 16일 MBC <뉴스데스크>의 최초보도 때만 해도, 그저 언론귀족 집안의 아이가 저지른 철부지 생떼나 시쳇말로 '땡깡'이려니 했다. 하지만 21일 <미디어오늘>이 보도한 폭언 녹취는 상상 이상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조선일보사와 방씨 일가의 사건 당시와 보도 이후의 대응 말이다. 보도에 따르면, 아이의 엄마이자 방 전무 아내 이아무개씨는 폭언 이후 운전기사 앞에서 아이를 나무라고 훈계한 지 하루 만에 태도가 돌변, 운전기사에게 해고 통보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방 전무 측 법률대리인은 김씨에게도 해고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또 폭언 녹취 보도와 관련, 방 전무 측은 MBC가 방송을 통해 딸의 음성을 공개한 것에 대해 "공인도 아닌 미성년자 아이의 부모가 원하지 않는데도 목소리를 공개해 괴물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지나친 보도라고 생각한다"며 "사생활 침해 등 법적인 대응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녹취를 접한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폭언 녹취 보도 이후 포털과 소셜 미디어 상에서는 10살 초등학생 아이의 상상 이상의 '막말'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일보 손녀'와 같은 관련 검색어는 22일까지 포털 검색어를 장식하는 중이다.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은, 이제 없다
 
"녹취된 10살짜리 초등학생의 폭언을 들어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평소 부모의 의식과 언행을 고스란히 따라한다고밖에 달리 보기 어렵다. 부의 대물림이 계급이 되고 신분이 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와 길항한다. 돈의 힘을 정치의 힘으로 누르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가난한, 그래서 정치적 목소리가 없거나 약한 사람들의 정치가 그 요체다."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녹취를 접하고 이러한 참담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수년간 이러한 대물림의 폐해를 직간접적으로 감내하는 중이다.
 
'맷값'이란 단어를 유행시킨, 영화 <베테랑> 속 유아인을 닮은 재벌 2~3세들이 그랬다. '땅콩회항'으로 국제적 망신을 자처한 언니에 이어 '물컵 갑질'로 물의를 빚은 동생은 어떠한가. 역시나 갑질 영상과 녹취로 공분을 산 그 부모에 그 자식 아니었던가. 방 전무의 이 10살 자녀가 10년 후, 20년 뒤에 조양호 일가의 딸들처럼 자라지 않으리라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국가부도 예측한 한시현 역의 김혜수 1997년 IMF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제작발표회가 24일 오전 강남구 CGV압구정에서 열렸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의 김혜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일주일간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11월 28일 개봉예정.

김혜수. ⓒ 권우성

 
"하지만, 당시 (IMF와의) 협상안을 읽으면서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경제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의 위기를 느끼고 고통 받는 근간이 된 것 같아 너무 속상했다. 요즘 초등학생 꿈이 유튜버와 건물주라잖나. 우리 사회의 시스템, 어른들의 욕망이 아이들까지 돈 생각을 하도록 부추긴 것 같아 충격적이었다."
 
최근 1997년 IMF 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 개봉을 기념한 라운드 인터뷰에서 배우 김혜수는 IMF 이후 한국사회를 진단하며 이러한 '충격'을 토로했다. 결국 <조선일보> 손녀의 갑질 폭언은 이러한 한국사회의 병폐가 낳은 심화 버전이라 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건물주 따위 꿈 꿀 필요도 없는 언론귀족의 손녀가 현현한 한국사회의 시스템, 어른들의 욕망이 낳은 병폐의 최극단 말이다.
 
2000년대 중반, 박찬욱 감독에게 화와 슬픔을 안겨줬던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은, 이제 없다. IMF 시대를 통과하면서까지 지켜질 것 같았던, 지켜내려 했던 품위, 품격과 같은 가치들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에서 '헬조선'에 이어 당도한 이 각자도생의 시대는 그저 대물림된 부만 손에 쥐고 있다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열어 젖혔다. 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방씨 일가의 손녀와 같은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마치 초등학생들의 꿈이 '건물주'인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과장이라고? 김혜수가 언급한 IMF 사태 당시나 박찬욱 감독이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이라 표현했던 2004년보다 나아지리라 장담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조선일보>가 안겨준 색다른 종류의 참담함은, 그 파장이 꽤나 오래갈 것 같다.

그리고, 22일 늦은 오후 이 '조선일보 손녀'의 아버지인 방정오 < TV조선 > 대표이사 전무가 전격적으로 대표이사직 사퇴를 선언했다. "제 자식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절 꾸짖어 달라", "운전기사 분께도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다시 사과드린다"는 내용이 담긴 대국민 사과문과 함께였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그간 재벌 2~3세들이 보여준 이러한 의례적인 사과에 이은 사퇴를, 그리고 짧게는 한두 해, 길게는 서너 해 후 이어지는 복귀 수순을. 과연 '조선일보'가 아버지 방정오에 대한 꾸짖음을 얼마나 길게 가져갈지, 또 그 아이는 어떻게 자라날지 오래오래 지켜 볼 일이다. 그간 국민들이 접하고 쌓여갔던 재벌 및 갑질 관련 대국민 사과의 양만큼 한국사회가 변했다면, '조선일보 손녀'인 10살 아이의 극악한 폭언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테니.
조선일보 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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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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