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영화 <사랑의 블랙홀> 포스터

영화 <사랑의 블랙홀> 포스터ⓒ Columbia Pictures Corpora

 
웨스 앤더슨과 짐 자무쉬의 영화에서 자주 보던 빌 머레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세상 다 살았다는 듯이 염세적인 말들을 내뱉으면서도 끝에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죠.'라고 말하며 개구진 미소를 지을 것 같은 괴짜의 이미지다. 그의 표정은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불쾌한 것인지, 도무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 수 없고, 그의 몸짓은 만사가 다 귀찮은 듯 느릿느릿 스크린 속을 표류한다. 

빌 머레이. 그에겐 그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영화에 출연하건 그는 '빌 머레이'이고, 버스터 키튼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연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를 구성한다.  

그는 1975년 미국 < SNL(Saturday Night Live)>을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고(대부분의 SNL 출연자들이 그러하듯 직접 대본을 썼다), 영화에도 진출해 1984년 <고스트 버스터즈>가 흥행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의 연기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다가 지금의 무심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만의 색깔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1993년에 나온 <사랑의 블랙홀>이다. 

<사랑의 블랙홀>은 마법에 걸린 공주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저주에서 풀려나는 동화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매사에 불만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빌 머레이)는 2월2일 성촉절(예수가 태어난 지 40일째 되는 날)에 열리는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PD인 리타(앤디 맥도웰),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펑추니아 마을로 간다. 이날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는 마못이라는 설치류 짐승이 봄이 오는 시기를 점치는 행사로 작고 조용한 마을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필은 서둘러 취재를 마치고 한시라도 빨리 지루한 마을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폭설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필과 그의 취재팀은 다시 펑추니아 마을로 돌아온다. 필은 오도 가도 못하고 마을에 갇힌 것이 심히 불만이나 자신의 불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어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린다.

다음날 아침 6시. 라디오 알람에 필은 눈을 뜨는 필. 어제와 같은 음악 '소니 앤 셰어'의 < I  got you babe >가 흘러나온다. 한심한 라디오라고 생각할 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필은 성촉절 행사 준비로 분주한 마을 사람들을 보고 2월 2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필은 도대체 몇 번의 반복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2월 2일을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악몽으로, 다음에는 재밌는 게임처럼, 그리고는 벗어날 수 없는 저주로 다가오는 2월2일의 반복은 필을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시키고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그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의 마법은 풀려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2월 2일이 지나 2월 3일이 시작된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로맨틱 코메디라는 장르에 타임 루프 설정을 더함으로서 <사랑의 블랙홀>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타인을 위한 행동을 하고, 목적지향이 아닌 과정에 의미를 두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말로 요약하면 진부한 얘기지만 이 진부한 얘기를 채우고 있는 에피소드의 디테일한 묘사와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을 몰입시키고 큰 재미를 선사한다.  

우선 '성촉절'이라는 날은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마못이 봄이 언제 올지 예상하는 이날, 마못이 제 그림자를 보고 다시 굴로 들어가 버리면 겨울이 6주나 더 길어진다는 속설을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봄이 이제나저제나 올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못의 그림자는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영화에서는 마못이 아니라 주인공 필이 제 그림자를 봐 버리는데 타임 루프에 빠진 그는 2월 2일을 무한반복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아 가며 변화한다. 이 모든 과정이 지루함 없이 유쾌한 공감이 가게끔,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편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시간이 흘러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걸작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자신이 타임 루프에 갇혔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지루한 마을에서 지루한 사람들과 지루한 하루를 언제까지 계속해야할지, 필은 좌절한다. 하지만 이내 현실에 적응한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건 오늘의 자신은 지워지고 아침 6시면 새로운 오늘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용해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고, 오직 하룻밤 상대로 여자를 유혹하고, 돈을 훔치기까지 하며 자신의 사소한 욕망들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는 의미 없는 행동들의 반복에 싫증을 느끼고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울리는 같은 라디오 음악소리에 절망한다. 여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아침 6시면 그는 같은 방에서 같은 음악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매일이 2월 2일이지만 결코 같은 하루가 아니다. 반복의 변주는 필의 심리상태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어 이를 함께 겪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또한 영화 초반에 심어놓은 장치들(인물, 사건)을 적재적소에 사용함으로서 관객이 지루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단순한 호감의 대상이었던 PD 리타를 유혹하는 것으로 하루의 목적을 바꾼 필은 인내심 있게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하루하루 그녀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는 그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목적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 시를 외고, 그녀가 좋아할 법한 말들을 내뱉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들통이 나버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항상 실패한다. 

이제 필은 거짓 연기를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자기밖에 몰랐던 그는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자기도 모르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그를 향한 반감의 시선은 호감으로 변해간다.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리타에게도 스며들고, 필은 진실된 사랑으로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약 당신이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산다면?'하고 필은 질문을 던지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무책임한 일탈이 아니라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상이라고 영화는 대답한다.

빌 머레이의 시니컬하면서도 끝에는 따뜻함을 남기는 연기와 리타 역을 맡은 앤디 맥도웰의 아름다운 미소가 인상적인 <사랑의 블랙홀>은 25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여전히 재미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보아야 할 <사랑의 블랙홀>은 빌 머레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영화로 그의 시작점과 지금을 이어주는 중요한 영화다. 멜랑콜리와 유쾌함이 결합된 빌 머레이의 연기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1998년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을 지나며 그 색이 진해지고, 2003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지나며 섬세함이 더해져서 오늘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다.
 
실생활에서도 괴짜인 걸로 유명한 그는 웨스 앤더슨과 짐 자무쉬의 지속적인 애정을 받아 오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대하는 느긋함이 담긴 그의 연기가 그들의 작품과 결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심드렁한 얼굴에서 아무리 세상 복잡하고 힘든 일도 언젠가는 다 지나갈 거라는 위로를 읽는다. 그런 힘을 가진 배우는 흔치 않다. 아무쪼록 더 많은 영화에서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