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편집자말]
언젠가 SNS에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글을 구구절절 길게 쓴 적이 있다. 참석한 한 행사에서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 '남성인 저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본 이후다. 페미니즘이 화두로 떠오른 지 몇 년이 지난 이래로 저런 질문을 정말 자주 마주치곤 했다. 그리고 이는 솔직히 개인적으로 의아한 현상이었다.

물론 '내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내 삶에 어떤 사회적 조건이 부여되어 있으며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특정한 '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고 그 여부를 고민하는 것은 나로서는 다소 공허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안 될 것도 없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사실 페미니스트인 남성이 많아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여성과 인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남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유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이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알다시피 우리는 강력한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회는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분류하며 두 집단 사이에 깊은 간극을 설정한다.

때문에 두 성별의 차이는 지나치게 부각되고 심지어 발명되기도 하지만(누차 강조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차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성은 부인된다. 인간은 하나의 광범위한 스펙트럼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성별이분법은 여성과 남성을 아예 '종(種)이 다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차이가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존재들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되기 이전에 해야할 중요한 일 
  
 남자 직장 동료

남성들에겐 젠더를 가로질러 동등한 유대를 맺어본 경험이 많지 않다. ⓒ Pixabay

 
이런 환경에서 개인들이(보다 정확히는 남성들이) 성별 정체성을 가로질러 상대방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이성애 연인들과 그들이 만든 가족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맞는 말이다. 다만 문제는 사회가 오직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애적 관계'만을 허락하고 장려하며(이것이 '남자와 여자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와 같은 말이 횡행하는 이유다), 그 관계의 형식과 그 속에서 따라야 할 역할을 이미 지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된 성역할은 불평등하기 짝이 없으며 여기에서 벗어날 경우 (대부분 여성에 대한) 비난과 처벌이 뒤따르는 것은 예사다. 일례로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숙려도 없이 단지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남편이 아내를 비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제도적인 관계 내부에서 사람들은 이미 형성된 틀에 따라 상대방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것은 인간적인 유대와 거리가 멀다.

결론적으로 대다수 남성들에겐 젠더를 가로질러 동등한 유대를 맺어본 경험도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것은 남성인 당신의 주변에 여성이 얼마나 많았는가와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다. 그 사람들이 '동료'가 아니라 그저 '주변인'으로 남아 있었다면. 그리고 이미 설정된 사회적 각본에 따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이 사회에 여성들이 가진 고민과 삶의 조건, 경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욱이 그 사랑이 관습적인 성역할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말이다. (가령 많은 남자들이 젠더 폭력의 원인을 질문하지 않고 단지 여성을 '보호'하겠다고만 나서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때로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과 여성혐오 문화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성을 '동료'로 마주한다는 것의 의미
 
 여성 동료.

왜 유독 '여성'의 말은 등장과 동시에 심문의 대상이 되는가. ⓒ Pixabay

 
우리는 다른 사람과 동료로서 협동하는 경험을 할 때, 적어도 대등한 유대를 맺고 신뢰를 교환할 때에 상대방을 구체적인 개인이자 얼굴을 가진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다. 사회가 만든 선입견과 편견 그 너머의 사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우리가 상대방이 살아온 삶과 경험한 것, 사회적 위치를 온전히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다. 긴 시간 여성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하며 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유일한 남성'일 때가 많았고 그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구성원 개인들과 각각 동료로서 관계를 맺으며 그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오해를 무릅쓰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많은 경우 그들은 나에게 '여성 동료'가 아니라 그냥 '동료'였다. 그리고 때로 그들은 나에게 여성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기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내가 상상한 것과 비슷했지만 예상을 아주 벗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부정할 것도 의심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내가 존중하고 믿고 있는 동료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성인 나와 여성인 동료들의 삶과 사회적 위치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유대의 형식과 한계를 정해놓고 내가 상대방을 온전히 존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그리하여 결국 동료들의 경험을 부인하고 선입견을 통해 바라보게 된다면 이는 정말 슬픈 일이 아닌가. 나는 많은 남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걸 덮어놓고 '여성과 남성, 사이좋게 지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이 여성의 삶을 이해할 조건에 이르지도 않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폭력과 불평등이 난무하는 현실을 현상유지하자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젠더 폭력과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집단적인 공론화와 문제제기가 이어지면 남자들은 그 경험들을 부정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조금만 분노해도 남자들을 비난하지 말고 성별 갈등을 조장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당사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데 의심부터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유독 '여성'의 말은 등장과 동시에 심문의 대상이 되는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보기에. 그리고 그러는 동안 이 사회의 남자들은 무엇을 모른 채 살아왔을까.

그가 페미니스트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래퍼 산이 트위터 화면 캡처. 산이는 지난 15일 신곡 '페미니스트'를 자신의 SNS에 올렸다.

래퍼 산이 트위터 화면 캡처. 산이는 지난 15일 신곡 '페미니스트'를 자신의 SNS에 올렸다. ⓒ 산이 트위터

 
사실 이 글을 적게 된 계기는 얼마 전 가수 산이의 'FEMINIST'라는 노래를 들은 것이었다.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를 밝히는 것에 양해를 구하고 싶다. 다만 곡이 발표된 이후에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심지어 노래의 메시지를 정반대로 뒤집어버리는 창작자의 입장문까지 등장해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처음에 나는 성별임금격차와 여성의 외모에 대한 규범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까지 산이가 노래에서 부정하거나 조롱했던 모든 것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글을 적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줄기차게 해온 것이었고, 산이 한 사람이 쓴 이상한 노래 때문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게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는 노래였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산이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가사를 썼을까'에 대한 글을 적었다. 그런데 새로 작성한 입장문에서 산이는 노래의 화자가 자신이 아니고 페미니스트인척 하지만 모순된 말과 행동을 하는 남자라고 설명했다. 그들을 비판하는 노래라고 말했다. 결국 글을 다시 썼다. 두 번을 다시 쓴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자 나는 애초에 산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최대한 선의를 가지고 그의 말을 믿어보아도 그렇다. 산이는 단지 페미니스트인척 하며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들을 비꼬고 싶었던 것일까? 무슨 맥락과 이유에서? 그래서 산이는 페미니스트인 것일까 아닌 것일까? 아니라면 그는 왜 마지막 입장문에서까지 '진정한 페미니즘' 감별사 노릇을 자처했을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일단 누군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중언부언할 때 거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어서다. 그리고 어떤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혹은 페미니스트인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는 산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산이는 이 희대의 사태를 설명하는 마지막 입장문에서(부디 마지막이길 바란다) '메갈'과 '워마드'가 탄생한 맥락과 배경에 대한 이해와 현실에서 두 단어가 어떤 낙인으로 쓰이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그들을 '일베'와 같은 혐오집단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이성적인 남녀는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차별과 혐오가 존재함을 보지 못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타깃'이 되는 공포를 공감한다고 말하며 이를 남성으로서 자신이 받는 공격과 은근슬쩍 등치시킨다. 심지어 그 '공격'이 정당한 비판일지도 모름을 애써 무시한 채.

말하자면 산이의 설명과 해명을 아무리 끝까지 들어보아도 그가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를 그리고 여성이 삶에서 겪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수의 여성들이 그것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암담할 노릇이다. 즉 노래 'FEMINIST'의 발표부터 다시 입장을 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산이가 여성을, 여성의 목소리들을 대하는 태도다. 그리고 앞서 적었던 그가 마주한 그 한계는 단지 산이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를 통해서든 입장을 통해서는 산이는 그 자신이 특별히 다른 존재임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산이 FEMINIST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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