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산이가 지난 16일 '페미니스트(FEMINIST)'라는 곡을 공개했다. 공개 후 3일째인 18일 현재 유튜브에서 산이 계정에 올라온 '페미니스트' 곡 영상은 조회수 138만 회를 기록 중이다. 이 곡이 화제가 된 건 곡의 완성도가 아니라 가사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가사에서 산이는 "책도 한 권 읽었지"라며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한다. 그러더니 "여자와 남자가 현 시점 동등치 않단 건 좀 이해 안돼, 우리 할머니가 그럼 모르겠는데"라고 말한다. 이후 가사에서는 "그렇게 권리를 원하면 여자는 군대 왜 안 가냐, 데이트 할 땐 돈은 왜 내가 내, 지하철 주차장 자리 다 내줬는데" 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산이 신곡 <페미니스트> 유튜브 영상 캡처.

산이 신곡 <페미니스트> 유튜브 영상 캡처. ⓒ 산이 유튜브


'페미니스트'라는 곡이 공개된 이후, 내용에 대해 지지와 비판의 상반된 반응이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성 회원이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속 시원하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게시글의 베스트 댓글에서도 '산이 용감하다, 지지한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면 비판도 제기된다. 트위터에서는 "여자한테 군대나 가라고 랩하는 래퍼가 있을 거란 상상은 했지만, 군대도 안 간 래퍼가 여자한테 군대 가라고 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라는 트윗이 3300회 이상 공유(리트윗)됐다.

16일 래퍼 제리케이는 산이의 '페미니스트'에 반박하는 곡 '노 유 아 낫(NO YOU ARE NOT)'을 공개했다. 제리케이는 산이의 '페미니스트' 가사를 비판하며 "CEO 고위직 정치인 자리 대신에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로 내는 생색", "없는 건 있다 있는 건 없다 우기는 무식/ 없는 건 없는 거야, 마치 면제자의 군부심"이라고 했다. 산이도 미국 국적자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는데, '권리 원하면서 군대 왜 안 가냐'고 랩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래퍼 슬릭도 산이의 노래에 맞서 '이퀄리스트(EQUALIST)'라는 곡을 공개했다. 슬릭은 산이의 '페미니스트' 가사에 반박하며 "여성혐오라는 글자마저 오독하는 놈이 여성혐오를 논하는 수준 너 빼고 다 알아"라고 랩에 담았다.

이후 산이는 19일 새벽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페미니스트'의 가사에 관해 해명했다. 해명문을 요약하면, '페미니스트'는 여성을 혐오하는 곡이 아니며 곡의 화자가 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이는 해명문에 "겉은 페미니스트지만 속은 위선적"인 사람을 비판하려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왜 미투해, 꽃뱀?"이라는 산이... 문제적 가사

앞서 공개된 곡 '페미니스트' 가사에는 "합의 아래 관계 갖고 할 거 다 하고 왜 미투해? 꽃뱀? 걔넨 좋겠다 몸 팔아 돈 챙겨"처럼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로 해석될 내용도 담겼다. 산이가 이 곡을 17일 온라인에 공개한 후, 그는 같은 날 예정됐던 여성 운동복 브랜드 행사 초대 게스트에서 제외됐다. 이런 가사를 쓰고도 여성 의류 브랜드 행사 무대에 오르긴 어렵지 않을까? 산이의 해명처럼 '화자를 따로 설정한' 가사라고 가정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앞서 산이가 본인 SNS에 올린 해명문을 100% 인정해서 '페미니스트'라는 곡이 "겉은 여성을 존중한다 말하지만 속은 위선적인" 사람을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한다면, 제리케이가 자신의 곡을 비판하는 랩을 공개했을 때,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며 맞장구를 쳤어야 그 의도가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산이는 제리케이를 향해 "한 대 맞아야겠다"라고 디스하는 곡 '6.9cm'를 발표했을 뿐이다.
 
'SBS가요대전' 산이, 파이팅넘치는 브이 가수 산이가 21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 SBS 가요대전 포토월 >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수 산이 ⓒ 이정민

 
"제리케이 참 고맙다 너 때문에 설명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라고 시작하는 '6.9cm'의 화자는 아마도 산이 본인에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6.9cm' 속 화자의 태도가 '페미니스트' 속 화자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6.9cm'의 가사에서는 "끝으로 내가 하고픈 말은? 정상적인 사람은 당연히 성평등에 귀 기울여 함께 바꾸려 노력하지만 근데 메갈은"이라며 "뭐만 해도 남자가 여자를 공격하고 있다며 거짓선동 끌어들여 get the fu*k out 그건 여성인권 아냐"라고 말한다.

남성의 잣대로 여성의 범주를 나누거나 진정한 여성인권과 아닌 것을 규정하는 게 두 곡의 화자가 보이는 태도다. 이는 여성혐오 표현을 초중반부에 싣고 뒷부분에 "난 여자 편이야, 난 여잘 혐오하지 않아, 오히려 너무 사랑해"라고 쓴 '페미니스트'의 가사와 똑같이 문제적이다. 인종차별적 표현을 내뱉은 뒤에 '난 사실 모든 인종을 사랑해'라고 덧붙인다고 해서 인종차별 표현이 아닌 게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해당 가사처럼 여성 일부에게 '메갈'-'꽃뱀' 따위의 단어로 딱지를 붙이고, 그 범주 바깥의 여성을 사랑한다는 식의 표현도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보지 않는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결국 이런 표현 때문에 '페미니스트' 가사에 대한 산이의 해명문은 논리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오리발을 내미는 격이 됐다.

표현의 자유를 누리길 바란다, 비판도 고스란히 감당할 수 있다면

그동안 산이 랩을 들으며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재치 부족이다. 산이는 19일 본인이 올린 해명문에서 '페미니스트의 전체 가사' 한 줄마다 해석을 덧붙인 사진을 첨부했다. "너 포함 내 엄마 내 누나 내 여동생 그대로 respect"라고 쓴 가사에는 "저(산이)는 친누나, 친여동생이 없습니다"라고 해석하며 화자가 본인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랩의 가사에는 본인만 알 만한 설정이 들어가 있고, 이에 해석을 덧붙여야 청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대중'을 상대로 한 활동은 좀 어렵지 않을까.

산이가 이해하기 힘든 설정을 선보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산이는 앞서 지난 10월 발매한 곡 '워너비 래퍼(Wannabe Rapper)'의 뮤직비디오 때문에도 비판을 받았다. 당시 산이는 '워너비 래퍼'의 뮤직비디오가 래퍼 차일디쉬 감비노의 '디스 이즈 아메리카(This is America)'를 오마주했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밝혔다. 해당 곡의 가사에서는 "그냥 hate all 남북 편 갈러, 한남 김치 좌익 우익 (fight) 싸움 구경 (yap yap)"이라고 쓴 부분이 눈에 띈다.

이에 차일디쉬 감비노가 흑인으로서 소수자가 겪는 폭력을 은유로 가사와 뮤직비디오에 담은 반면, 산이의 현실 인식은 '한국 사회, 그저 싸우기만 하네'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관련 기사 : '한남'이나 '김치'나 다 똑같다? 산이의 새 노래가 불쾌하다). 사회에 만연한 갈등이 '왜' 발생했는지에 관해서는 쏙 빼놓고 '편 갈라 싸우니 불편하다'고만 말하는 식이다. 이는 산이가 지난 2017년 1월 발표한 곡 'I Am Me'의 가사에서 "여혐, 남혐, 일베, 메갈, 여당, 야당, 너, 나", "오, 제발 플리즈. 모두 시끄럿!"이라고 쓴 부분의 연장선상으로도 보인다. 이런 관점과 표현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건, 신선한 단어를 조합해 번뜩이는 랩을 선보여야 할 사람으로서는 게으르다는 방증에 가깝다.

산이의 가사처럼 맥락을 덜어내고 '사회 갈등 다 시끄럽다'라고 외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사를 쓰고, 녹음을 하고, 온라인에 업로드하기 전까지 이에 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깝다. 그리고 결국 이전 곡들에 담겼던 얄팍한 논리와 고갈된 문학성이 또 다시 낳은 결과물이 논란이 되고 있는 '페미니스트'인 셈이다. 

누군가는 산이의 랩 가사도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표현의 자유를 기꺼이 누리려면, 제기되는 비판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산이가 이번 논란을 계기로 조금 더 공부하고 젠더 문제에 관해 제대로 알아가길 바란다.

한편 산이와 같은 소속사인 '브랜뉴뮤직' 소속 래퍼 키디비는 래퍼 블랙넛의 성적 모욕 가사에 소송을 진행 중이다. 동료에 대한 예의로라도 여성혐오적 가사를 담은 곡의 공개를 취소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래퍼 산이가 정말 '페미니스트' 속 화자가 본인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다면, 폭력적인 가사를 담은 '페미니스트' 유튜브 영상을 삭제하는 등 스스로 음원을 걷어들이는 노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가수 산이

가수 산이 ⓒ 브랜뉴뮤직

산이 페미니스트 슬릭 제리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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