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 선명한 선홍색 입술, 희고 날카로운 이. 전설과 민담을 바탕으로 유구한 시간 동안 분야를 횡단하며 존재한 뱀파이어는 인간과 다른,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거기에 영생, 흡혈, 햇빛에 화상을 입는 뱀파이어의 기본 속성은 뱀파이어 서사의 관습이 돼, 우리가 뱀파이어를 인간으로부터 '타자'로 인식하도록 했다.

뮤지컬 <배니싱>의 뱀파이어 케이 역시나 충실히 뱀파이어의 관습을 따른다. 영원한 삶을 살며 흡혈에 대한 본능을 지녔고, 햇빛에 화상을 입는 케이는 뱀파이어의 기본 능력과 특질 선상 위에 쓰인 인물이다. 게다가 무대에서 케이가 형상화되는 이미지는 인간보다 동물을 닮았으며, 어딘가 음침하고 우울하지만, 신비감을 자아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뱀파이어를 떠오르게 한다.

인간적인 뱀파이어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케이를 통해 인간의 고독함과 결여를 말하고자 한다. 케이의 바람은 누군가와 함께 햇빛 가득한 거리를 걷는, 가장 인간다운 욕망과 맞닿아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뱀파이어를 둘러싼 인간 세계는 가장 비인간적인 세계다. 작품 안에서 시공간적 배경을 차지하는 1920년대 경성은 식민지 현실과 쏟아지는 서구 문명 속에 비틀거리며 인간성을 잃어가던 시대를 상징한다. 거기에 작품 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과학 문명은 당대 전쟁을 위한 생체 실험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는 대의 아래 우생학이 성행하였다. 그렇담 <배니싱>은 묻는다. 뱀파이어라는 타자와 경성이라는 주체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가?

뱀파이어와 인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케이의 외로움은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다. 의신을 만난 후, 케이의 욕망은 햇빛 속을 걷는 것에서 하나의 존재로서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것으로 바뀐다. 그러니, 의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케이의 선택은 외로움에 기인한 욕망의 발로였을 테다. 

그리하여, 뱀파이어가 된 의신의 욕망은 흡혈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 인간 사회로 회귀하는 것으로 발현된다. 거기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명렬의 욕구가 더해지면, 작품은 소속을 위한 인간과 타자의 욕망으로 뒤덮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과 타자의 욕망을 나란히 배치했단 점인데, 이로 인해 작품 내부에서 인간과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나아가 작품은 케이가 지닌 흡혈이란 속성을 뱀파이어 고유의 속성에서 전복시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케이는 말한다. 인간도 타인의 피로 살아가지 않느냐고. 그리고 넘치는 피의 역사 속에 자신이 마신 피는 몇 방울 되지 않는다고. 여기에서 명렬은 인간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로써 작용한다. 명렬은 출세를 위해 총독부에 기생하며 뱀파이어가 된 의신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명렬은 손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인물일까? 우린 그럴 수 있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명렬을 닮아있단 점이다. 명렬은 의신을 속여 인간의 피를 마시게 했고, 우린 타인의 희생을 통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다. 우린 살인을 하지도, 인간의 피를 마시지도 않지만, 타인의 희생을 양분으로 삼아 살아간다는 점에서 명렬과 다르지 않다. 과연, 흡혈의 폭력성과 세계의 폭력성은 다른가.

그럼에도 인간들은 케이를 '구척 귀신', '흡혈귀'라는 타자의 이름을 붙인 뒤 폐가로 몰아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붙여진 이름은 몇 가지 성질만을 대변할 뿐, 개인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타자의 이름과 인간보다 인간적인 욕망 사이에는 머나 먼 간극이 놓일 수 밖에. 이 일련의 알레고리는 주체 집단의 폭력성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않고, 단편적인 시선에 머물러 보았으며, 타자로 몰아냈는가.

'사라지는 것(Vanishing)'의 의미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의신만은 달랐다. 의신은 어느 날 외딴 폐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검은 귀신에게 앎의 욕구를 품었으며, 그 검은 귀신에게 타자성 대신 '케이'라는 이름의 평범함을 부여했다. 이러한 의신의 열정은 케이를 변화시키기에 마땅했다. 어느새 케이의 욕망은 햇빛 속을 걷는 것에서 다시 외로워지지 않는 것, 타인에게 이해받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으니.

그러나 의신조차 케이가 사라지는(vanishing) 순간에야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존재 케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난 후 의신 역시 햇빛 속으로 사라질 때, 작품은 비로소 제목 '사라지는 것(Vanishing)'을 통해 전하고 싶던 궁극의 메시지인 '인간의 불완전한 이해'에 도달한다.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그러나 이런 해석이 자의적인 해석 수준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를 구현하는 방식이 적절해야 할 테다. 아쉽게도, 성긴 서사와 명확하지 않은 메타포에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가령, 케이의 순간적인 결심에 의해 의신이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전개에는 불쑥 '저 장면에서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든다. 가장 핵심적인 순간에 이입이 되질 않으니, 케이의 외로움은 영원히 공감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남을 밖에.

개연성 부족은 비단 케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욕망과 의지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인물 간 갈등과 개인의 고뇌는 마땅하게 표현되질 않으니, 행동은 당위를 찾기 힘들다. 거기에 무대의 세팅과 오브제는 어떠한가. 반투명한 무대 세팅은 알고 보더라도 그 시대, 그 장소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며, 나무 밑동만 남은 오브제는 대체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 길이 없다.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뮤지컬 <배니싱>의 포스터 및 공연 사진ⓒ 네오프러덕션

 
아쉬움에도 반짝임은 있다. 세 인물의 욕망이 만드는 서정적이면서 강렬한 서사는 <배니싱>이 가진 가장 큰 반짝임이다. 게다가 조명의 쓰임도 훌륭하다. 케이가 의신과 피의 교환을 시도할 때, 무대 전체에는 붉은 조명이 떨어져 강렬한 순간의 임팩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또 죽은 케이를 안고 햇빛 속에서 사라지는 의신의 마지막을 표현하는 조명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는 주제 의식은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뱀파이어란 타자의 특성으로 부터 보편적인 주제 의식으로 확장시킨 과정에는 따스한 휴머니티를 담고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와 노력이 객석에 닿기 위해선,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야 할 테다. 연출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덜어야할 부분과 채워야할 부분은 아직 잔재한다. 그리하여 작품의 메시지가 이해되길 바란다.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떠돌다 말고 사라지기엔, 그 가치들이 너무나도 아깝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제 아무리 대단한 가치를 이야기하더라도 '재미'가 없는 극은 그 가치를 다 하기 힘듭니다. 그것을 소비해줄 관객이 없으니까요. 재미있게 쓰여진, 그러나 그 끝에는 오래도록 되새겨질 여운을 남기는 극을 찾기 위해 오늘도 객석에 존재합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