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기자 말.
 
 영화 <블러드 심플> 포스터

영화 <블러드 심플> 포스터ⓒ Circle Films

 
코엔 형제의 영화엔 언제나 특이한 인물, 만약 일상에서 만난다면 "나 오늘 진짜 이상한 사람 만났어"라고 얘기할 만큼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말도 안 되게 엉뚱하거나 사악해서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과 생동감을 극에 부여하고, 탄탄하게 쓰인 플롯은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들의 데뷔작 <블러드 심플>은 신인답지 않은 안정감과 과감성이 보이는 영화로 기존의 영화문법을 따르면서도 그들만의 호흡으로 극을 끌고 가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내 애비(프란시드 맥도먼드)의 불륜을 의심한 술집 사장 마티(댄 헤다야)는 사립 탐정 로렌(M.에멧 월시)을 고용해 아내를 감시한다. 그리고 아내가 술집 직원 레이(존 게츠)와 내연관계인 것을 알게 된다. 질투와 배신감에 몸서리치던 마티는 로렌에게 청부 살인을 사주한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사악한 로렌은 그의 분노를 이용해 함정을 놓고 완전범죄를 계획한다.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Circle Films

 
영화는 사립 탐정 로렌의 독백과 함께 텍사스의 황량한 도로를 비추면서 시작된다. 로렌의 냉소 가득한 목소리는 세상은 불만으로 가득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잘못될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불만을 가진 채로 살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로렌의 가치관은 당시 코엔 형제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블러드 심플>은 인간의 불신과 탐욕을 치정 사건에 대입한 흥미로운 스릴러 영화다. 줄거리는 영화의 장르가 치정 스릴러라고 말하고 있지만, 스타일은 필름 누아르와 1960년대 유럽 모더니즘 영화가 섞여있어 관객들에게 신선하고 독특하게 다가온다. 

로렌의 나레이션이 끝나고 나면 칠흙 같이 어두운 밤, 빗속을 달리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애비와 레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출 때에만 둘의 실루엣이 겨우 비칠 뿐,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레이인지 애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차 안은 어둡다. 남편 마티를 떠나기로 결심한 애비는 레이의 도움을 받아 휴스턴으로 가는 중이다.(사랑의 도피가 아니다!)

애비는 레이에게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고, 레이는 자기가 결혼 상담가도 아니고, 이들의 결혼생활에 딱히 관심도 없으나 애비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들의 대화는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고, 애비의 혼돈과 레이의 나른함만 느껴질 뿐이다.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Circle Films

 
두 사람은 모텔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그들은 자신들이 마티에 의해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 전화는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게 만들고, 불이 꺼진 방 안에서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인지, 주차장의 차가 밝히는 불빛인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모습은 빛에 의해 간헐적으로 노출된다.

이 영화에서 '빛'은 어둠을 밝히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체의 부분만 비춤으로서 오히려 오해와 왜곡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다음날, 애비는 휴스턴이 아니라 레이의 집으로 향하고, 마티는 사립탐정 로렌으로부터 애비와 레이가 불륜을 저지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된다. 

마티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애비의 불륜을 가십 대하듯이 하는 속물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로렌에게 마티는 역겨움을 느낀다. 마티는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일이 없다는 듯 그에게 멸시의 말과 행동을 퍼붓지만 로렌은 그런 마티를 비웃듯 개의치 않는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것은 탄탄한 플롯과 캐릭터, 주제의식을 묘사하는 데 있어 과감함을 보이는 미장센의 밸런스다.

자신의 사무실에 혼자 남은 마티는 배신감과 질투에 괴로워한다. 그가 화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표정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감독은 천천히 돌아가는 팬(천장 선풍기)과 마티를 극단적인 부감과 앙각으로 한 프레임 안에 위치시킨다. 이를 통해 마티의 화가 단지 화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한다.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Circle Films

 
마티는 좀처럼 분노를 진정 시킬 수가 없다.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 옆에 있는 소각장 불길을 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여기서 관객은 '설마 애비와 레이를 죽이고 시체를 태우려는 건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레이에게 밀린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정도로는 복수가 충분하지 않자 그는 제 발로 로렌을 찾아가 청부 살인을 사주한다.

그리고 로렌은 살인의 증거로 애비와 레이가 총을 맞고 죽어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마티에게 건넨다. 서로의 거래가 완성되는 순간, 로렌은 마티를 향해 총을 쏜다. 반전의 순간이다. 마티는 로렌을 이용해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려 했고, 로렌은 그 복수심을 이용해 돈을 챙기려 했으나 이들의 욕망은 계획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영화 <블러드 심플>의 한 장면ⓒ Circle Films

 
스릴러 영화에 복선과 맥거핀은 필수다. <블러드 심플>에서도 복선과 맥거핀들이 심어져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애비의 권총이다. 애비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기 위해 (마티와 함께 살던) 집에 갔을 때 그녀가 권총을 집는 순간 이 권총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예상할 수 있다. 이 권총은 로렌이 완전 범죄를 계획하게 하는 발단이 되고, 마티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레이가 애비를 오해(그녀가 마티를 죽인 것이라고)하게 되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레이가 한 행동은 애비의 오해(레이가 마티를 죽인 것이라고)로 이어진다. 

애비와 레이는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는 있으나 서로가 사랑이라 느낄 만큼 강한 감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이는 아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얄팍한 감정은 이들이 오해를 쌓는데 한 몫하고, 쌓인 오해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사건을 끌고 가고 그 안에서 이들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존재 자체가 저열하고 '돈' 말고는 그 어떤 삶의 기준이 없는 로렌은 도입부 나레이션에서 고백한 그의 가치관을 차치하더라도 말투와 눈빛부터 불쾌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인물이다. 사건을 조작하고,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던 그 역시 죽음을 맞이하지만, 관객은 안도와 평화가 아닌 (재미와 별개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Circle Films

 
관객은 이야기를 즐기는 한편, 등장인물들에게 동화되거나 연민을 가지지는 않는데, 이는 영화가 뜨거운 이야기를 차갑게 풀어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코엔 형제의 냉소적인 시선은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으며 때로 웃지 못 할 상황에 웃음이 터지게 되는 어이없는 유머를 발휘하기도 한다.

<블러드 심플>에서도 그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는데 맥거핀으로 사용된 셰퍼드의 등장이 그러하다. (마티의 반려견 셰퍼드를 보는 순간 관객은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그 개가 나중에 마티와 함께 애비를 찾아왔을 때 혹여 애비를 물어뜯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이지만, 개의 순하고 애교 있는 모습에 안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마티가 애비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블러드 심플>은 제1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고, 코엔 형제는 단숨에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아리조나 유괴 사건>, <밀러스 크로싱>, <바톤 핑크>로 이어지는 놀라운 필모그래피는 이들 형제를 이 시대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각인 시킨다. 인간의 위선과 삶의 부조리를 냉철한 유머로 깊이 있게 바라보는 코엔 형제의 시선은 첫 작품 이후로 녹슬지 않고(중간 중간 범작들이 있기는 했지만) 계속되고 있으며, 그들의 신작은 언제나 영화 팬들의 가습을 두근거리게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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