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9일 오후 3시 18분]

최근 변화한 젠더 인식은 각종 문화 콘텐츠에서 여성 캐릭터의 변모를 꾀하게 했다. 위험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왕자의 도움을 기다리던 매체의 여성상은 대중교통에서 성추행하는 남성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배짱을 지녔으며, 사회 적폐에 맞서 싸우는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바야흐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던 신데렐라의 시대는 저물고, 스스로 백마에 올라타는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초석을 디딘 상태일 뿐, 아직 대다수 매스 미디어가 내어놓는 여성 서사는 눈 가리고 아웅 식 속임수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페미니즘 뮤지컬 <모던 걸 백년사> 서승연 연출가 인터뷰에서 거론된 말처럼, "20대 여성의 지난한 삶은 한 아저씨의 따스한 시선과 맞닿아 휴머니즘을 만들고, 30대 여성의 혹독한 삶은 연인의 구원을 통해 로맨스로 서사화 된다."(2018년 5월 2일자, <아트인사이트> '[티켓북마크]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목소리, 극단 '하이카라' 서승연 연출가' 중에서 발췌)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08년형 신데렐라에 비해 2018년형 신데렐라는 대사가 두어 줄 늘었다는 정도이다. 현실의 고작 이러하기 때문에, 여성이 아직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연예술계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여성 관객의 비율이 전체 관객의 과반수를 훌쩍 넘고, 이들은 줄곧 남성 중심 서사의 계보를 향해 쓴 소리를 내뱉고 있다지만, 지속적으로 재생산 되는 건 남성 중심 서사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일각에서는 여성 배우 10명이 주인공인 뮤지컬이 등장했다.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한 여인에 대한 네 남자의 욕망을 다루거나, 여성을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눈 뮤지컬이 스테디 셀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재공연 되고 있다.

마틸다, 기적같은 널 축복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이런 상황 속에 신데렐라가 기다리기만 하는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 일찍이 반문한 소녀의 등장은 희소식일 따름이다. 뮤지컬 <마틸다>는 그간 애타게 외치던 여성 서사임은 물론이거니와, 이례적으로 여자 아이가 단독 주인공인 뮤지컬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조력자, 악인 또한 모두 여성으로 표현된다. 비록 마틸다는 남근의 부재에 실망하는 아버지와 댄스 경연을 딸 아이의 출생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탄생했지만, 관객들 기대와 축복 속에 우리 곁으로 왔다!

이야기는 분명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될 테다. (게다가 어린 시절 동화라도 한 번쯤 마틸다를 접한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당신의 기억 속 엷게 떠오르는 그것과 같다.) 집안에서 푸대접을 받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소녀와 어린이를 구더기라고 칭하며 경멸하는 교장이 주인공인 가족 뮤지컬이다? 그렇담 소녀가 뛰어난 재능으로 교장을 격파하겠고, 앞으로 소녀의 삶은 행복해질 테다. 권선징악의 교훈은 휴머니티를 담아 따뜻하게 전해질 테고, 나아가 꿈에 대해 생각하게 할 테다.

이야기는 예상 범위를 크게 웃돌지 않는다. 식상한 전개지만, 기분 좋은 친숙함이다. 문제점은 예측한 범위 밖의 장면의 이음새가 엉성하다는 거다. 마틸다가 미세스 펠프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실은 미스 허니의 과거를 본 것이라거나, 악당 교장을 물리치는 수단이 비상한 머리 덕분이 아니라 어느 날 발현한 초능력 덕분이라는 전개에는 이음새가 결여돼 있다. 그렇다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가 주인공이라더니, 정말 어린이 뮤지컬이었어?

우리 어린 날의 자화상 마틸다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작품은 비현실에서 막을 내리지만, 마틸다는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를 반영한다. 태어나자마자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던 마틸다, 여자 아이는 책 대신 거울을 보는 게 옳다는 집안에서 자란 마틸다, 그럼에도 어디서든 당차고 씩씩하게 굴던 마틸다. 비록 우리는 초능력을 쓰지 못하더라도, 마틸다는 많은 여성들의 어린 날을 닮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동화를 닮은 성장담은 미숙하고 엉성할지라도 눈물 나게 예쁘고 사랑스럽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지금까지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내 어린 날이 펼쳐지는 걸 보고 어떻게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있겠나. 많은 여성 관객들은 여자 아이라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마틸다가, 마침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결말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그리고 현재를 돌아보며 그간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에 위안 받는다. 그러니, 유치하더라도 뮤지컬 <마틸다>를 사랑할 수밖에.

그래, 이게 뮤지컬이지!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이 작품이 소설과 영화 분야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여기까지는 뮤지컬만의 장점이 되지 못할 테다. 뮤지컬 <마틸다>가 소설과 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다면, 우리는 굳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극장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럴 거면 VOD 서비스가 제공하는 영화 채널에서 결제를 하거나, 가까운 서점으로 향하고 마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뮤지컬 <마틸다>는 완벽하게 뮤지컬만의 문법으로 재해석되어 이러한 걱정은 기우였음을 거뜬하게 증명해 보인다. 모자이크 형태의 무대, 마틸다의 온갖 기발하고 동화적인 상상력을 구현한 특수효과와 조명은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부지런히 인도한다. 그리고 무대와 조명을 배경 삼아 평균 연령 11세 아이들이 하나의 극을 원톱으로 이끌고 가는 순간은 경이롭게 느껴진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기적처럼 대형 극장 전체를 감싼다.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뮤지컬 <마틸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뮤지컬적 순간을 꼽자면, 단연 'When I Grow Up'이다. 어른이 된다면 이루고 싶은 사소한 꿈을 말하는 가사에 맞추어 아이들은 무대 중앙에 놓인 그네를 탄다. 그네가 높이 더 높이 오르면 어느새 아역 배우들은 성인 배우들로 바뀐다. 마침내 그네가 객석 앞부분 머리 맡에 도달하여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무대 위 아이들의 작은 소망과 객석 어른들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회상은 한 프레임 안에서 감각적으로 구현된다.

아이들이 떠난 후 빈 그네에 앉아 담임 교사 미스 허니는 'When I Grow Up'을 속삭인다. 마치 객석에 그네가 날아들 때 과거를 회상하곤 했던 우리의 모습 처럼. 이어 마틸다는 'Naughty'를 부른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꾹꾹 참고 살기만 한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괴물을 무찌를 수 없다고 말이다. 이 흐름은 <마틸다> 서사 전체를 관통하며, 미스 허니로 대변되는 객석 어른들에게 삶의 정수를 전달한다. 서사와 메시지, 음악과 동선은 한 시퀀스에서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 이것은 소설과 영화가 할 수 없는 뮤지컬만의 스토리 텔링이며, 우리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 오늘도 객석에 앉는 이유다.

오래도록 성장할 마틸다를 위하여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사랑스럽고 감동적이지만 한 켠에 아쉬움은 생긴다. 더 '잘 만든' 여성 서사가 될 수도 있었을 거란 아쉬움 말이다. 마틸다는 두 가지를 극복하여 성장한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성 세대와 성 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사회 문화. 트런치불이 전자를 상징할 테고, 웜우드 부부가 후자를 상징하여 마틸다와 대립할 테다. 여기에서 이 작품은 트런치불과 마틸다의 갈등 구조를 줄기 삼고, 웜우드 부부와 마틸다의 갈등 구조를 잔가지 삼아 이야기를 전개 하는데, 이 일련의 전개를 통해 작품의 중심에는 '어린이 마틸다'가 놓인다. 마틸다는 '여성'과 '아이'라는 두 가지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아이'라는 특성은 극대화되며 '여성'이라는 특성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표현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소수자성에도 우열이 존재하는 걸까?

그러다 보니 다른 의문도 생긴다. 'Revolting Children'에서 남자 아이가 마이크를 집어드는 순간엔, 왜 마틸다는 혁명가가 될 수 없을까? '아무리 똑똑한 아이였다고 한들 여자 아이는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건가' 하는 불쾌감이 불쑥 고개를 든다. 나아가 <빌리 엘리어트>와 <마틸다>가 짝패를 이루는 뮤지컬임을 감안할 때, 결말에는 안타까움의 탄성이 터진다. 빌리 엘리어트는 위대한 발레리노가 될 테지만, 마틸다는 능력을 잃고 평범한 소녀가 되어 가정으로 회귀하는 결말. 이 작품은 여성 공동체를 구현했다지만, 마틸다를 '집 밖'이 아닌 '집 안'에서 안정을 느끼고 만족하는 인물로 가뒀기에.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뮤지컬 <마틸다>의 한 장면 ⓒ 신시컴퍼니

 
평범한 삶이든 특별한 삶이든 마틸다만 행복하다면 괜찮다며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 마틸다의 이야기는 더 잘 만들 수 있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그러니 바라던 이야기를 만났다며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면죄부는 우리에게도 마틸다에게도 독이 될 테다.

무엇보다 이제야 우리 곁으로 온 이 기적 같은 아이가 곁에서 오래도록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리고 앞으로 세상에는 더욱 많은 마틸다가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이 세상 모든 마틸다를 위하여.
뮤지컬 마틸다 페미니즘 여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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