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기자 말
 
 <밀레니엄 맘보> 영화 포스터

<밀레니엄 맘보> 영화 포스터 ⓒ 화인커뮤니케이션

 
중국계, 특히 홍콩에서 활동한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엄청난 작품 수에 놀랄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덕화는 1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주윤발은 100편 이상, 장만옥은 9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배역이 크든 작든 일반적으로 보통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는 쉽게 생각 할 수 없는 작품 수이다. 
 
대만 출신의 배우 서기 역시, 20여 년이 조금 넘는 활동기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서기는 1996년 당대 최고 스타인 장국영과 함께 출연한 <색정남녀>로 데뷔와 동시에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홍콩금상장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별 무리 없이 스타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녀가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가벼운 코미디나 액션 영화였으며 그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 역시 적당히 가볍고 섹시한 캐릭터로만 소비될 뿐이었다. 서기가 만약 2001년 <밀레니엄 맘보>라는 작품을, 더 정확히는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배우로서 그녀는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에 잠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밀레니엄 맘보>의 한 장면

<밀레니엄 맘보>의 한 장면 ⓒ 화인커뮤니케이션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처음엔 서기와의 만남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역시 그녀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에게도 결정적으로 작용해 이후 많은 작품에서 그녀와 함께하게 된다. 

2001년 개봉한 <밀레니엄 맘보>는 주인공 비키(서기)가 자신의 2001년을 회상하는 영화다.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내려앉은 다리 터널을 건너는 비키의 발랄한 걸음 위로 그와 대조되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남자친구 하오하오(투안 춘하오)와 헤어졌지만 늘 그래왔듯 결국 그에게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익숙한 체념이 서려있다. 슬로우 모션으로 늘어지는 그녀의 즐거운 몸짓은 이때 들려오는 대만 일렉트로 뮤지션 림기옹의 몽환적인 음악, A Pure Person과 조화를 이룬다. 그녀는 말한다. 이것은 모두 10년 전인 2001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화자의 현재, 그러니까 2011년의 비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지금의 고립된 자신을 돌아보는 십년 후의 자신을 상상을 하고 지금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그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2001년은 지나왔지만 우리는 다시 그녀의 2001년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화인커뮤니케이션

 
보는 순간 각인이 되는 인상적인 오프닝 신이 지나고 나면 하오하오의 질투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키의 일상은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상관없을 만큼 반복된다(비키의 내레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 순으로 진행이 되지 않아 줄거리를 쫓는 방식으로 영화를 본다면 금방 집중력을 잃기가 쉽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동거를 시작한 비키와 하오하오. 하는 일도 없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하거나 게임을 하고 노는 게 전부인 어린 연인은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모두 써버린다. 더 이상 손 벌릴 데가 없어지자 비키는 술집 호스티스 일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여전히 일을 하지 않는) 하오하오의 의심과 질투가 시작된다. 비키가 집에 돌아오면 그는 왔냐는 인사도 없이 그녀의 가방을 뒤지고 그녀에게서 다른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체취를 맡는다. 별 이상이 없으면 다시 조용히 디제이 연습을 하던 방으로 들어가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점이 있으면 비키를 추궁한다. 

첫 장면에서 자유로워 보였던 그녀의 몸짓과 반대로 그녀의 인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고립되어 있고, 밖에서 명랑하고 밝았던 그녀의 얼굴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 웃음을 지우고 말을 잃어버린다. 첫 만남에서 조용하고 수줍어하던 하오하오를 보고 사랑에 빠졌던 비키는 자신을 구속하고 자신의 청춘을 갉아먹는 사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하오하오가 계속해서 듣는 반복적인 테크노 음악처럼,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화인커뮤니케이션

 
술집에서 알게 된 일본인 형제를 따라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로 여행을 떠난 비키는 90세 생일을 맞이한 형제의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100살이 넘어서까지 살고 싶다고, 그래서 유바리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영화 속에서 보이는 유바리는 90세 노파만큼이나 노쇠한 모습이다. 마을에서 열리는 영화축제는 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고요하고, 극장에 붙은 옛날식 포스터는 감흥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비키는 대만에서의 문제들을 잊고 환하게 웃지만 하얀 눈이 과거의 마을을 뒤덮고 있듯이 비키의 문제들은 잠시 가려져 있을 뿐, 짧은 여행이 끝나고 그녀는 과거의 진행형인 현재로 돌아온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모두들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기대하지만 21세기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다. 비키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야쿠자 중간 보스 잭(고첩)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잭은 그녀가 호스티스 일을 그만두고, 하오하오를 떠날 수 있도록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의 문제가 있고, 그 역시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비키는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떠난 잭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가서 그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녀는 말한다. 이 모든 일들은 2001년, 십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한 장면 ⓒ 화인커뮤니케이션

 
한발 짝 멀리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물들을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림기옹의 전자음악은 영화의 리듬과 호흡을 같이하며 청춘의 무기력함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서기의 연기 또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밝고 명랑한 비키의 공허한 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결국 배우는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그의 가치가 결정된다. 장만옥이 왕가위 감독을 만나면서 그녀의 커리어가 확장되었던 것처럼, 서기 역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나면서 그녀가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상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기는 <밀레니엄 맘보>와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한 두 번째 영화 <쓰리 타임즈>로 대만 금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개인적인 취향일 순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안에서 서기의 매력과 연기가 가장 아름답게 빛났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사람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으로 모델이 되고 배우가 되고 스타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언젠가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이제 그녀는 그 시선들을 영화 안으로 잡아당기는 배우가 된 것 같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터널을 지나는 비키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과연 그녀는 세월의 터널을 지나 그때의 혼돈에서 벗어났을까? 혹은 지금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밀레니엄 맘보 서기 대마영화 허우샤오시엔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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