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지병으로 별세한 '국민배우' 신성일 씨의 빈소가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6일, 장지는 경북 영천의 선영이다.

4일 지병으로 별세한 '국민배우' 신성일 씨의 빈소가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6일, 장지는 경북 영천의 선영이다.ⓒ 연합뉴스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 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배우 안성기, 이덕화 등 영화인들이 운구에 참여하고 있다.

▲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배우 안성기, 이덕화 등 영화인들이 운구에 참여하고 있다.ⓒ 권우성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 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부인 엄앵란, 아들 강석현 등 유가족과 영화인들이 고인의 운구를 지켜보고 있다.

▲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발인60년대부터 한국영화 대표배우로 활약했던 ’영원한 스타’ 고 강신성일 한국영화협회 명예 이사장 발인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화인장으로 엄수되었다. 부인 엄앵란, 아들 강석현 등 유가족과 영화인들이 고인의 운구를 지켜보고 있다.ⓒ 권우성

 
지난 4일 새벽, 배우 신성일씨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1962년 첫 주연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시작으로 주연작만 506편인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가 되었다. 신성일의 이력이 곧 '한국 영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큰 족적을 남긴 배우다.

그의 영전엔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송해 선생을 비롯해 신영균, 최불암, 이순재, 안성기, 문희, 이창동, 조인성 등 다수의 영화계 동료·후배들이 다녀갔다. 또 한때 정치에 몸담았던 그의 경력답게 이회창, 김병준, 유승민 등 유력한 정치인들이 조문했다. 그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으며 6일 오전 10시 영결식이 진행됐다.

하지만 최근까지 대중들에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영화인생'이 아닌 개인사가 얽힌 가십거리들이었다. 언론을 통해, 대중의 입을 통해 확산된 신성일씨의 말년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영화인 신성일의 모습을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신성일·지승호 지음)를 통해 알아보려고 한다.

호떡 장사를 하던 청년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다

대구시 중구 인교동 한옥 마을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공무원이던 홀어머니 아래서 "애비 없다는 소리 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당시 명문인 경북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대로였다면 서울대를 갔었을 거라는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계가 깨져 어머니는 야반도주를 하고 신성일은 대구 이모 집으로 간다. 대구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청년 신성일은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대학에도 떨어지고 호떡 장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는 그런 상황을 부끄러워 하셨지만 노배우는 그 시절을 "주위 눈치 보지 않고 나를 키워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던 시절"이라 회고했다. 가수가 된 동향 친구가 자신을 무시한 채 지나가버리자 자존심이 센 청년은 '너보다 잘 난 내가...' 하며 눈에 띈 '한국 배우 전문학원'을 다짜고짜 찾았다. 그곳에서 이제는 누렇게 빛바랜 그의 '50년 보물'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얻었고, 김기영, 김수용 등 당대 최고 감독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영화 <맨발의 청춘> 스틸 컷

영화 <맨발의 청춘> 스틸 컷ⓒ 김기덕


꿈이 원대했던 청년은 엑스트라 배우를 전전하는 대신 2640명이 몰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신인 배우 모집 현장을 당당하게 찾았고, 대번에 신 감독에게 "나하고 함께 일해보자"는 소리를 듣고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신 감독의 성에 별 성, 한 일을 붙인 신성일이란 예명까지 받은 '신인 배우' 신성일의 시작은 처음부터 반짝이진 않았다. 30kg이 넘는 자동차 배터리를 나르며 현장을 전전했고, 감독님 책상 옆 전화를 받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그런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승마와 검도로 몸을 만들며 때를 기다렸고,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은희 배우 중심의 신필름의 시스템에는 젊은 배우 신성일이 들어갈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제 중년에 접어든 김진규, 최무룡을 대신할 젊은 배우를 찾던 극동 흥업의 대본을 접했고, 군 입대 전 마지막 작품으로 그것에 도전하리라 마음 먹는다. 그리고 드디어 1962년 당시 인기 있던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라이징 청춘스타'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가정교사>에 출연했고, 1964년 드디어 당시 6대 신문이 입을 모아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알렸던 <맨발의 청춘>에 출연,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10년 동안 한국 인기를 독차지한 신성일

1960년대는 한 해 200여 편 넘는 영화가 만들어지던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해방, 6.25. 4.19, 5.16의 격동기를 거치고 라디오 말고는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대 대중들에게 잘 생기고 예쁜 남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열광할 만한 것이었다. 냉난방은커녕 화장실에선 악취가 나고 찢어지지 않은 의자가 드물었던 데다 화면에는 비가 오듯 줄이 죽죽 갔지만,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1960년 태평로 사옥이 있던 옆에 아카데미 극장을 열었다. 당시 극장과는 차별된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개봉된 영화가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불과 18일 만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두 남녀 주연배우 신성일-엄앵란은 당시 <조선일보>가 제정한 청룡영화상 인기상 후보들 사이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10년 뒤인 1973년까지 인기상은 배우 신성일의 몫이었다.
 
 영화 <만추> 스틸 컷

영화 <만추> 스틸 컷ⓒ 이만희


신성일은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당선작이었던 <흑맥>으로 이만희 감독을 만난다. 그리고 다음 해 <만추>를 찍게 되는데, 신성일은 이만희 감독에 대해 "머릿속에 콘티가 다 들어있는 훌륭한 감독"이라 평하며 "<만추>는 구성,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짜임새, 영상, 연출 기법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내가 출연했던 작품 중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다"라고 회고한다.

1967년에 47편, 1967년에 51편 등 다작을 하던 신성일은 신춘문예 당선작 <무진 기행> 등을 컷백(cut back) 등 새로운 연출 기법을 도입한 김수용 감독과 함께 한다. 개정된 영화법으로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져 너도 나도 '문예 작품'을 영화화하던 시절에 신성일은 황순원, 김동인, 심훈 등 한국 문학 전집에 나오는 소설가들의 작품 모두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0년대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반공 영화' 의무 제작 등 사회적 분위기가 내려앉았고 거기에 더해 외국 영화 쿼터제와 엄격한 검열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호스티스' 영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7년 <겨울 여자>로 58만 명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1976년에는 134편 총 제작 영화 중 7편, 1977년에는 9편, 1978년 4편 등으로 그가 출연한 영화는 급격하게 줄어들며 배우 신성일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다

배우 신성일이 말하는 연기론에서 가장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자기 관리'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그는 가십성 스캔들로 대중들에게 소비되었지만,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이렇다 할 스캔들이 없었다. 아니, 스캔들이 날 시간이 없었다는 게 정확하달까. 한 해에 수십 편이 만들어 지던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작품이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는 24시간을 4등분해서 어떤 날은 8편을 찍으면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그가 그렇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배우 학원 시절부터 체력 관리, 몸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최무룡, 김진규 등 이미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1960년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그의 경쟁력은 젊음, 그리고 단련된 몸이었다. 알랭 들롱이나 제임스 딘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던 그는 걸음걸이부터 고치는 등 그에 걸맞은 몸을 만들었다. 젊은 시절뿐만이 아니었다. 1982년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길소뜸> 촬영 당시에는 운동만으로 82kg에서 68kg으로 감량했다.
 
 길소뜸

길소뜸ⓒ 임권택

 
대종상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그는 1968년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한 <이상의 날개>로 남우주연상을 탔다. 이후 <길소뜸> <위기의 여자> <레테의 연가> 등에서 계속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하여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어섰다. 청춘스타로 출발한 그이지만, 1960년대 후반엔 문예 영화로, 다시 <내시> 등의 사극부터 액션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며 변신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신성일씨는 "나대로 신성일을 가지고 있되, 작품의 패턴이 바뀔 때마다 내 몸을 그 속에 던져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회고했다. 이를 위해 나이가 들어서도 늘 긴장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배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신성일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에서 찾을 수 있다. 신성일은 맹장수술을 했을 때, 한여름 땡볕 아래서 액션장면을 찍다가 쓰러졌을 때의 며칠, 신인시절 깁스를 했을 때 말고는 영화 현장에서 다쳐도 치료를 받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던 성실한 배우였다.

시대를 냉철히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 애정을 놓치지 않던 배우.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후배 영화인들 중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하는 노년을 보냈고 이제 유명을 달리했다.

박찬욱 감독 말처럼 프랑스의 알랭 들롱이나 미국의 그레고리 펙, 이탈리아의 마스트로얀니 같다는 신성일. 그의 인터뷰를 통해 진솔하고 성실했던 배우 신성일의 존재를 되살리는 것으로 '추모의 념'을 대신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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