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쉬의 단독 콘서트 'wonderlost'

크러쉬의 단독 콘서트 'wonderlost' ⓒ 아메바컬쳐

 
한국에서 '알앤비'라는 단어는 한 동안 오해의 대상이었다. 알앤비를 표방한 가수들 중 많은 이들이 브라이언 맥나잇이나 보이즈 투맨처럼 화려하게 노래했기 때문일까? 알앤비는 곧 '소몰이 창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2007년 한 시상식에서 한 발라드 그룹이 '알앤비 소울 음악상'을 받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수상자는 감사를 표하는 한편,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하는 음악은 알앤비 소울이 아니라 대중음악입니다"라고.
 
그리고 시대가 변했다. 2018년 현재, 대중들이 알앤비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그 때와 크게 달라졌다. 웅장한 연주보다는 미니멀한 신시사이저, 화려한 고음보다는 보컬이 만들어내는 세련된 그루브가 더 중시된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한국 알앤비의 얼굴은 누구일까? 저마다 의견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크러쉬의 이름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스타일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알앤비 싱어송라이터는 몇 되지 않는다. 
 
크러쉬가 나누고 싶었던 것
 
지난 11월 3일 토요일, 서울 올림픽홀에서 크러쉬의 단독 콘서트 'wonderlost'가 열렸다. 약 4천 명의 팬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감각적인 VCR 영상이 재생되었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비트에 이어, 장막이 걷혀졌다. 크러쉬는 'Hey Baby'를 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역동적인 비트의 노래인만큼, 오프닝부터 폭죽과 특수 효과를 아끼지 않았다. 크러쉬는 쉼없이 'Newday', '밥맛이야', 'Cereal' 등 경쾌한 곡들을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공연이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공연의 클라이막스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크러쉬는 공연이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서야 첫 멘트를 했다. "특유의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올림픽홀에 서겠다는 목표를 이룬 기쁨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살면서 쉽게 잃어버린 것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지나간 시간, 옛것과 아날로그 감성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었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 의미 때문이었을까. 크러쉬는 이 날 공연에서 전광판에 거장 스티비 원더의 얼굴을 띄워 놓은 채 'Stevie Wonderlust'를 부르기도 했다. (이 곡은 제목 그대로 크러쉬가 자신의 우상인 스티비 원더에게 바치는 곡이다.)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발라드 넘버도 잊지 않았다. '도깨비'의 OST 'Beautiful'과 1집 수록곡 '가끔'을 연이어 부른 것이다. 이 두 곡을 부르는 동안 그는 움직이는 이동 무대에 몸을 맡겼다. 조명 감독은 모든 조명을 껐고, 관객들은 휴대폰 라이트로 공연장을 밝혔다.

공연 중반, 그는 오롯이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었다. 신곡 'None'의 라이브를 처음으로 팬들에게 선보였고, '잊을만하면'으로 팬들을 집중시켰다. 크러쉬가 자신의 힘든 시절을 생각하며 쓴 노래 '2411'은 묘한 위로의 순간을 만들었다. 그 순간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알앤비 스타가 아니라, 버스에서 자신만의 무대를 꿈꾸던 신효섭 학생이었다. 
내 유일한 쉼터 2411 버스 안에서
버스 안에서 매일 다짐 했었네 포기하지 않기로
- '2411' 중

 
그리고 크러쉬는 다시 한 번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노래와 랩을 모두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뮤지션이고, 힙합계와 뗄 수 없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최근 EP에서 'RYO'를 함께 작업한 CIFIKA, 바밍타이거의 병언(BYUNG UN)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식케이(Sik-K) 역시 게스트로서 크러쉬와 호흡을 맞췄다.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크러쉬지만, 그의 목소리는 'Give It To Me', '눈이 마주친 순간'처럼 야릇한 슬로우잼에서 크게 빛을 발했다. 적나라한 가사, 그리고 격정을 연출하는 가성이 몹시 잘 어우러졌다. 그는 알앤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몹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크러쉬의 단독 콘서트 'Wonderlost'

크러쉬의 단독 콘서트 'Wonderlost' ⓒ 아메바컬쳐

 

 
울고 웃는 크러쉬
 
공연이 후반부에 이르자, 크러쉬는 앉아있는 관객들에게 일어설 것을 주문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일어섰고, 'Skip'의 펑키한 기타 리듬이 울려 퍼졌다. 공연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선곡이었다. 1집의 타이틀곡 'Hug Me'를 부르는 동안, 그는 즉흥적으로 춤을 췄다. 다음 곡 'Outside'에서는 한술 더 떴다. 마이크를 무대 위에 맡겨놓고, 관객들에게 물을 뿌리며 비트를 즐겼다.
 
한편 크러쉬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콘서트에서는 울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내 편이 돼줘'와 '잊어버리지 마'를 한 목소리로 부르는 팬들을 보며 울컥한 마음이 들었는지, 노래를 이어가지 못 했다. 역시 눈물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것이다. 공연을 마친 크러쉬는 모든 방향의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이 내려간 후에도 인사를 거듭했다. 
 
이번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밴드 'Wonderlust'가 함께 했다. 밴드와 브라스 섹션의 존재는 크러쉬의 보컬만큼이나 중요했다. 이들은 이번 공연에서 소리의 밀도를 높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기존 곡을 공연 분위기에 맞게 편곡하면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크러쉬와 밴드의 합도 좋았다. 크러쉬 역시 공연 초반에 "이 공연은 크러쉬의 공연이기도 하지만, 밴드 Wonderlust의 공연이기도 하다"며 밴드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군더더기없이 탄탄한 공연이었다. 크러쉬는 '좋은 가수는 좋은 공연으로 말한다.' 는 간단한 명제를 스스로 증명했다. 그의 노래는 말을 걸듯 다가왔다. 단순히 곡을 나열하는 수준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공연을 구성하고자 애쓴 티가 났다는 것도 강점이다. 무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가수의 공연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분좋은 일이다. 크러쉬의 'Wonderlost'는 11월 4일, 일요일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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