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11월 5일 오전 9시 5분]

"저건 빨갱이 영화잖아! 저딴 걸 영화로 만들어 가지고 쯧쯧..."
"그러게, 꼴 보기 싫은데 그냥 나가자구마!"


영화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쯤 노인 몇 사람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통로로 빠져나갔다. 서울노인영화제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달 27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11회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들은 대다수가 단편독립영화들이지만, 이날 상영된 영화는 특별했다. 국내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남승석 감독이 만든 <하동채복 : 두 사람의 노래>였다. 영화는 부부인 김하동, 김채복씨가 1980년대 과거를 회상하거나 당시 구치소에서 썼던 편지를 읽는 장면으로 채워졌다. 부부는 편지를 읽으며 때로는 울먹이기도 하고 때로는 담담하게 웃기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두 주인공은 현재 귀농하여 경상도 한 농촌 마을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영화는 밭을 가꾸고 토마토를 수확하는 등 부부의 일상 공간을 조명한다. 카메라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카메라는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그들의 주택을 중심으로 커가는 농작물과 햇살, 주택의 작은 다락방 유리천장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늘,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계절의 변화들이 부부의 수많은 편지들과 맞물려 돌아간다.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우러지게 만든 것이다.
 
30여 년 전 부부가 겪은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 스틸 컷

<하동채복: 두 사람의 노래> 스틸 컷 ⓒ 남승석


영화는 30여 년 전 부부가 겪은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편지)을 통해 이들의 현재를 바라본다. 지금은 담담해 보이는 부부의 삶 이면에는 1980년대 대학시절과 노동운동, 구치소에서 보낸 시간이 자리하고 있다.

하동이 당시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인식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새까만 기름에 찌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형의 모습을 보게되면서다. 그 전까지 하동의 기억 속에는 말쑥한 차림으로 출퇴근을 하던 형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채복 또한 당시 공장지대였던 구로동 성당의 학생회를 통해 어두운 사회상과 열악한 여성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을 알게됐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청춘은 젊음과 낭만, 좋은 직장에 대한 욕구보다 시대를 향한 고민으로 가득찬다. 두 사람은 인권신장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암흑 같은 시대를 함께 고민했다. 또 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외치고 열망하면서 서로를 향한 애틋함도 커져만 갔다.
 
보안사요원에게 검거되어 구치소에서 쓴 편지에는 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가 담겨 있다. 그 편지에서는 현재를 감각하고 기대하는 모습도 묻어난다. 30년 전 편지를 읽는 부부의 모습에서는 가끔씩 망각과 민망함, 아픔이 묻어나고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 당당하게 맞섰던 보람도 엿보인다.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 이승철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바로 광장을 밝힌 촛불의 주인공(들)이 '우리'임을 보여준다. 과거의 편지를 읽거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간 중간에 잠깐씩  등장하는 영상은 참으로 특별하다. 한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를 일궈냈던 바로 그 현장, 광화문 촛불광장의 모습이다. 다양한 요구가 담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마치 어느 축제의 현장처럼 보였다.
     
"저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어린 여공들 대부분은 저보다 몇 살씩 어린 동생들이었어요. 저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던 그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제가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 대학생인 제가 부끄럽기도 했구요."(채복)
 
"물론 지금도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만족스러운 세상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희망은 보이잖아요? 지난 촛불광장을 보면 이제는 어느 누구 몇 사람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세상이 된 것 같아요."(하동)

 
채복과 하동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영화 속 부부는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젊은 시절 연애편지(?) 속에 담긴 수많은 사연들은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세월의 물결만큼이나 결이 많았다.
 
"참 감동적이네, 저런 사람들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누리고 사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좋은 대학도 나오고 편히 잘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눈물이 자꾸 나와서~우린 저런 사람들에게 빚진 인생이야..."


105분짜리 다큐 영화를 다 보고 일어서던 두 사람이 조그맣게 나누는 대화가 얼핏 귀에 들어왔다.
 
 남승석 감독

남승석 감독 ⓒ 이승철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를 물었다. 감독은 "서울예술대학교 학생에게서 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며 고초를 겪었던 부모가 당시 주고받았던 편지 한 상자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학생의 부모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민족이라는 키워드 속에서 개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어왔는지, 고통스러운 과거의 공간이 현재 어떤 의미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이러한 공간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질문한다. 하동과 채복은 구로공단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들은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려는 참된 삶을 선택하였다. 그들의 삶, 그들의 청춘, 그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그러나 결국 절망적이었던 실재 기억을 영화적으로 구성했다."
  
남승석 감독은 2008년에 극영화 <키키+고도>(72분)를 비롯하여 2009년에 역시 극영화 <브레인 커뮤니케이션>(24분)과 <니나>(63분), 그리고 2010년에도 역시 극영화 <지혜>(97분)와 <부스>(19분) 등 5편의 영화를 만들어 내놓은 바 있다.
 
이번 <하동채복 : 두 사람의 노래>는 그의 여섯 번째 작품임과 동시에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이번 다큐멘터리 영화에 자신의 역사의식과 인생관을 고스란히 담아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물했다. 40대 후반의 영화감독 남승석, 앞으로 그가 꽃피울 영화인생이 기대가 된다.
하동채복 남승석 촛불집회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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