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낭군님>의 김차언(조성하 분).

<백일의 낭군님>의 김차언(조성하 분). ⓒ tvN

  
tvN 사극 <백일의 낭군님>에서는 좌의정 김차언(조성하 분)이 실질적 임금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원동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쿠데타를 일으켜 지금의 왕인 이호(조한철 분)를 추대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호와 결혼동맹을 맺었다는 점이다. 자기 딸 김소혜(한소희 분)를 세자 이율(도경수 분)과 혼인시켰다. 이렇게 미래의 왕후를 딸로 둠으로써 그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손자가 왕이 되면 왕실 외척으로서 한층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김차언 같은 권력자를 경계했다. 김차언 같은 외척은 왕조 정치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소로 인식됐다. 왕조 정치에서는 각 정파들이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속에서 운영됐다. 만약 외척이 가문의 실력이 아니라 왕실과의 인척 관계를 매개로 권력을 독차지하면, 왕조 정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나라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경쟁에서 밀려난 정파들이 왕조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왕실은 백성과 영토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갖지만, 외척 가문들은 전권을 쥔다 해도 그런 책임감을 갖기 힘들었다.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 약 60년간의 세도정치 때 등장했던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는 어느 정도는 국가 전체를 위하는 면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했다. 나라를 이끄는 집단이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1800년 이후에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으로 대표되는 조세 제도의 혼란으로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빈발한 것은, 외척 가문들이 협소한 시야에 갇혀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를 위협적으로 노크하는 데도 조선 정부가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정국을 주도하는 외척 가문이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왕실과 경쟁자들을 제압하기에도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외척한테 나라를 맡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19세기 전반의 조선 역사는 잘 증명한다. 왕들이 가급적 한미한 집안과 사돈을 맺으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이 자기 처가인 민씨 집안에 이어 아들 세종의 처가인 심씨 집안까지 풍비박산 낸 것은 외척 정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이방원은 군사력을 갖고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 못지않게, 인척 관계를 내세워 권력을 확대하는 외척 가문도 경계했다. 그래서 외척을 상대로 피의 살육을 감행한 것이다.
 
왕실과 정치권의 경계심이 그렇게 대단했는데도, 외척들은 곧잘 발호했다. 외척이 억제되거나 숨죽인 시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도 꽤 많다. 고도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권력을 농단할 수 있었던 것은, 왕후의 지위가 대통령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통령 부인은 예우는 받지만, 공식적으로는 대통령 가족에 불과하다. 대통령 부인이라는 지위 자체에서 공적 권한이 생기지는 않는다.
 
왕후는 군주의 아내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독자적인 권한의 보유자였다. 궁궐 여인들로 구성된 내명부를 지휘하는 권한, 공직자 부인들로 구성된 외명부를 지휘하는 권한에 더해, 임금의 유고 시에는 비상대권을 행사하거나 후계자를 지명하는 권한까지 행사했다. 1426년에 세종이 도성을 비운 새 대형 화재가 발생하자 소헌왕후 심씨가 정부 차원의 화재 진압을 지휘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임금이 도성을 비운 경우에 왕후가 정부를 통솔한 행사한 사례도 있었다.
 
대통령 부인은 남편이 퇴임하면 평범한 입장으로 돌아가지만, 왕후는 남편이 죽으면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대비나 대왕대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왕후를 배출한 가문은 왕비족이 되어 왕족에 버금가는, 경우에 따라서는 맞먹거나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왕이 왕후에게 별도로 권력을 주지 않더라도, 이처럼 왕후라는 지위 자체에서 권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왕후의 친정 식구들이 권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속의 김차언이 쿠데타 주역이라서 권력이 이미 확고한 데도, 추가적으로 외척 지위까지 굳히려는 것은 그 지위가 주는 정치적 효용성 때문이다. 
 
 김차언의 딸인 세자빈 김소혜(한소희 분).

김차언의 딸인 세자빈 김소혜(한소희 분). ⓒ tvN

  
그런데 외척으로 시작했지만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 이가 있다. 한나라(전한) 말기의 유명한 외척인 왕망(기원전 45~서기 23년)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성제 황제(재위 기원전 33~기원전 7년) 때 정치 거물로 떠오르고, 성제 다음 다음인 평제 황제(기원전 1년~서기 5년)와 유영 황제(서기 5~8년) 때 임금 이상의 절대 권력으로 떠올랐다.
 
그는 외척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잘 보여주었다. <백일의 낭군님>의 김차언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악행을 많이 저질렀다. 권세를 지키기 위해 자기 가문 사람들은 물론 자기 아들까지 죽였다. 자기가 옹립한 임금이자 사위였던 평제까지 독살했을 정도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유영을 몰아내고 직접 황제가 된 뒤였다. 서기 8년에 신(新)나라 황제가 된 그는 백성과 영토 전체를 생각하는 넓은 시야를 보여줬다. 호족으로 불리는 지방 토호세력을 억제하고 일반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를 돕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왕전제(王田制)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그는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으로 명명한 뒤, 장정 8명에게 왕전 900무(畝, 약 41.4헥타르)를 맡겼다. 8명이 각각 100무씩 경작하게 하고, 나머지 100무는 세금 납부용으로 공동 경작케 했다. 제도의 취지는 토지 균분을 통해 경제적 평등을 달성케 하는 것이었다. 히가시 신지 미에대학 교수의 <왕망, 유교적 이상에 매료된 남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요컨대, 농민 가족 부부가 경작할 수 있는 표준 면적이 100무라고 당시에 인식됐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으로서 모든 성년 남자 개개인에게 100무의 토지를 경작케 하고, 그 수확물에 대한 세액을 종래의 3배인 10분의 1로 증가시키려는 것이었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면서 조세 증대를 꾀했으니, 백성도 돕고 정부도 돕는 일석이조 정책이었던 것이다. 특권층을 도우면서 재정 수입을 기대하는 정책이 아니었으니,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왕전제는 주나라 때의 정전제를 본받은 것이다. 우물 정(井)처럼 9등분된 토지의 9분의 8은 8가구가 각각 균분하고 9분의 1은 조세 납부를 위해 공동 경작하는 정전제를 모방한 제도였다.
 
정전제는 중국 역사에서 두고두고 개혁가들의 로망이 됐다. 두고두고 로망이 된 것은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개혁이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귀족이나 호족들이 가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로망이 왕망 시대에 실현됐던 것이다. 정치적 부조리의 주범인 외척 출신이 이런 일을 해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왕망도 결국 실패했다. 기득권 세력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건국 15년 만인 서기 23년, 신나라는 간판을 내렸다. 한나라 황실의 일족인 광무제에 의해 한나라는 부활됐고, 역사는 이 나라를 후한이라 부른다.
 
왕망은 외척 정치가의 폐단을 보여준 동시에 이상적인 개혁가의 모습도 보여줬다. '외척 정치가는 악당'이라는 공식의 예외를 보여주고 떠났다. 처음에는 외척 정치가였지만 나중에는 훌륭한 개혁가였으므로 비판보다는 칭송을 더 많이 들어야 했지만, 기득권층의 심기를 건드린 괘씸죄로 그는 역대 중국 왕조에서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찬탈자니 희대의 간신이니 하는 악평이 그를 따라붙었다. 만약 그가 외척 정치가로만 그쳤다면 그 정도 욕은 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일의 낭군님 외척 왕망 세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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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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