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토요일, 그 날은 운이 좋았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가을인데 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나? 이럴 때는 머리를 비우는 게 최고다. 무작정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신촌에 내렸다. 목적지도 없이 신촌 기차역으로 걸어 가는데 마이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메가박스 신촌' 영화관 앞마당에서 영화를 틀어주고 있다. 영화관 앞마당에서 영화라니 '이건 돈 주고 보는 영화가 아닌가 보다'라고 직감했다. 돈 안주고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운이 좋은 날이다. '쪼르르' 에어 스크린 앞으로 달려갔다.

우연히 들른 곳에서 만난 '노동인권 영화제'

역 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마침 개막식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이 한 명씩 나와서 인사를 한다.
 
 서대문근로자복지센터의 최경순 센터장의 인사말

서대문근로자복지센터의 최경순 센터장의 인사말 ⓒ 문세경


"노동인권 영화제에 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서대문근로자복지센터 센터장 최경순입니다. 우리 센터는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서울시, 서대문구,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뜻이 맞아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해고나 임금체불 등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노동상담을 해드리고… (중략) 오로지 내 노동만으로 삶을 꾸려가는 모든 노동자에게 작은 위로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고보니 '서대문 근로자 복지센터'에서 주최한 '제6회 서대문 노동인권영화제'다. 지자체의 근로자복지센터에서 이런 기획을 하다니 의외였다. 거기다 "저녁을 꿈꾸다"라는 주제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개막식이 끝나고 상영될 영화의 해설을 듣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영화는 스페인 감독인 빼레 호안 벤뚜라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였다.

2013년 스페인이 기록한 청년 실업률은 55%다. 높은 자부심으로 지켜오던 공공의료 시스템은 망가지고 은행이 휘두르는 자본의 횡포는 심했다. 그 밖에도 갑갑한 일들이 시민들의 목을 조여온다. 하지만 그들은 당하고 있지 않는다. 조여오는 숨통은 연대로 트인다. 철학교사, 배우, 음악가, 퇴직 주부 등 평범한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연대한다. 연대의 방식도 다양하다. 기차와 버스를 구해 수도인 마드리드로 이동해 집회를 열고…

어느 나라도 노동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똑같다. 암울한 사회,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직업, 장시간 노동 등.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영화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웬만큼 시간 배분을 잘 하지 않으면 주말도 어렵다. 어쩌면 영화 보는 것보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것을 더 좋아할지 모른다. 지친 육체와 정신도 쉬어야 하므로. 법정 노동시간으로 정한 주 52시간은 언제쯤 지켜질까.
 
 영화제 주최 측 모습

영화제 주최 측 모습 ⓒ 문세경


이번 영화제는 "저녁을 꿈꾸다"라는 주제에 맞게 노동자들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더 나은 노동과 더 나은 삶을 위한 '저녁',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저녁', 일터를 벗어나 또 다른 이들과 함께 즐기는 '저녁'에 대해서 말이다. 거창한 만찬이 아닌 가벼운 도시락을 들고 친구, 연인, 가족들과 함께 모여 영화를 보고 파티를 즐기는 영화제다.
 
 <사라센의 칼> 상영 모습

<사라센의 칼> 상영 모습 ⓒ 문세경


행사는 10월 20일 오후 2시에 시작해 오후 9시에 끝났고 다음 날인 21일 일요일에도 오후 2시에 시작해 오후 10시에 끝났다. 토요일에는 주민노래자랑이 오후 2시~ 4시 30분까지 있었으며 도시락 파티도 했다. 나는 앞에서 말한 <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때>와 변규리 감독의 <플레이온>을 봤다. 일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는 헤더 화이트, 린 장 감독의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미국)>, 호바르 부스트니스 감독의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노르웨이)>, 임재영 감독의 <사라센의 칼(한국)>로 총 5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변규리 감독의 <플레이온>은 SK브로드밴드를 설치하는 수리 하청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과정을 담았다. 이들은 "노동자가 달라졌어요"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하며 하청노동자로 일하면서 느끼는 서러움을 말한다. 진상 고객들의 뒷담화를 하면서 애환을 나누고 자신들의 꿈과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들에게 라디오 스튜디오는 또 하나의 삶의 무대다.

고단한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기를
 
 메가박스 영화관 앞마당에 붙여진 영화제 현수막

메가박스 영화관 앞마당에 붙여진 영화제 현수막 ⓒ 문세경


하청 노동자들은 1차 하청업체의 정규직 전환을 바라며 파업에 돌입한다. 지난한 파업 끝에 1차 하청업체의 정규직이 되었다. 하지만 월급이 반으로 줄어든다. 노동자들의 마음은 조금씩 복잡해진다. 그러던 어느날 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던 봉근은 일을 그만둔다. 저마다 개성을 가진 케이블 가이들의 사연이 전파를 타고 흐른다.

영화 <플레이온>은 오후 7시 30분에 시작했다. 보는 중에 배가 고팠다. 배고픔은 곧 추위를 동반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주최 측은 팝콘을 나눠주었고, 추워하는 관객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는지 담요를 갖다 주었다. 안 그랬으면 나도 영화 보다가 집에 갈 뻔했다. 담요가 있으니 한결 나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소망나무 시민들이 광장에 있는 소망나무에 소망을 써 붙이는 모습

▲ 소망나무 시민들이 광장에 있는 소망나무에 소망을 써 붙이는 모습 ⓒ 문세경


영화가 끝난 후 광장을 둘러 보았다. "나에게 저녁이 필요한 이유는?"이라고 묻는 '소망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아직 철거되지 않았기에 주최 측에 최종 결과를 물었다. 1위가 여행이고, 2위가 휴식이라고 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면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상투적인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지겨운데 1위가 '여행'이라니 그럴 만하다. 선홍빛으로 물든 단풍이 있는 곳이면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을테니까.

뒹구는 낙엽만 봐도 영혼이 털리는 외로움, 그 외로움을 달랠 길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서서 의외의 소득을 보았다. 어느새 황량했던 내 가슴엔 따뜻한 장작이 타올랐다. 가슴에 불이 붙었으니 더 태워야 하는데, 혼자 나선 길이라 누구를 붙잡고 소주 한 잔 하자고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도 없으면 혼술이나 하지 뭐. 하면서 자리를 뜨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가방을 '툭' 쳤다.

"문세경 쌤, 여기서 만날 줄 몰랐네요. 반가워요.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합시다."  

은평노동인권센터의 센터장인 강화연 선생님이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 선물이 쏟아진 셈이다.  

"앗~! 선생님, 반가워요. 안 그래도 소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같이 온 사람이 없어서 혼술 하려고 했거든요. 잘됐네요."

고단한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었으면 좋겠다. 쓸쓸한 가을, 털린 영혼에 영화와 사람과 술이 채워지는 것처럼, 우연히.
 
서대문근로자복지센터 영화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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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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