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 커넥트픽쳐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1951년 폴란드 프와코비체. 끔찍했던 전쟁이 끝난 지 고작 6년이 흐른 그때, 북한의 전쟁고아 1500명이 폴란드에 도착한다. 아이들은 파란 눈의 서양인이 어색했고, 폴란드인들은 처음 만나는 동양인 아이들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상처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전쟁고아 출신이었던 폴란드 양육원 교사들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극복했고, 전쟁의 공포에 떨던 아이들은 교사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천진난만함을 찾아갔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하나의 상처를 가진 이들이, 서로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각자의 상처를 치유한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대중에게는 배우로 더 익숙한 추상미 감독은 폴란드로 간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다룬 첫 장편영화 <그루터기들>(가제)을 준비하며 취재를 위해 폴란드로 향했다. 생존 교사 대부분이 90세가 넘었고, 아직 국내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극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그들이 살아있을 때 이들의 육성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고, 취재 과정 그대로를 노출해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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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로 간 추상미, 그가 만난 '특별한 상처'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커넥트픽쳐스


영화에 등장하는 교사들은 70년 전 아이들을 회상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청년 시절 좋은 일을 했던 보람된 기억일 수도 있을 텐데, 무엇이 이 교사들을 이토록 긴 시간 마음 아프게 만드는 것일까?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추상미 감독은 이들이 공유한 '특별한 상처'를 이유로 꼽았다. 

"프와코비체 양육원 원장님이 기차역에서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동양 아이를 생전 처음 보셨대요. 하나같이 검은 머리에 까만 눈,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도 없었지만, 그 아이들이 본인들 유년 시절의 일부처럼 느껴지셨대요. 그래서 본능적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커리큘럼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걸 아셨대요. 그래서 '선생님' 대신 '엄마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다더라고요. 

선생님들은 인생에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이 북한 아이들을 돌보던 그 시기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만나고 돌본 건 국가의 결정 때문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보셨어요. 단지 아이들이 불쌍하다, 이런 차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나의 분신, 내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 선생님들이 70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을 잊을 수 없는 건, 아이들을 돌본 그 시간이 선생님들이 전쟁 때문에 누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빈 공간을 채워줬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치유한 전쟁의 상처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커넥트픽쳐스

 
제2차 세계대전이 폴란드에 남긴 상처는 어마어마했다. 폴란드에서만 3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고아원이 전쟁고아들로 넘쳐나던 상황이었다. 폴란드 교사들은 전쟁이 남긴 자신들의 상처를 채 극복하기도 전에, 생김새도 언어도 다른 먼 나라의 고아들을 떠맡았다. 하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폈고, 다친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며 자신들의 생채기 역시 함께 치유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처 받은 개인들이, 서로를 통해 치유하고 치유 받은 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주는 감동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탈북 청소년들이 다니는 여명학교 교감 선생님이 계신데, 폴란드 선생님들처럼 아이들을 돌보고 계세요.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학교에 있는 탈북 청소년 중에는 시체안치소에 버려지고, 수용소에 다녀오고, 이런 힘든 경험을 한 아이들이 많아요. 탈북 과정에서 여러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이 아이들을 데리고 필리핀 쓰레기 섬에 자원봉사를 가셨는데, 그 곳에서 아이들을 안아주고 도와주면서 엄청나게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상처도 많이 치유한다고요. 

어쩌면 상처를 풀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을 많이 번다고,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치유되는 종류의 상처가 아니잖아요. 선생님들도 같은 상처를 지닌 아이들을 감싸 안고 보듬으면서 자신들의 상처 역시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으셨던 것 같아요." 
  

취재하며 함께 아문 감독과 배우의 상처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추상미 감독과 탈북 소녀 이송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흔적을 쫓으며 자신들의 상처 역시 치유한다.ⓒ 커넥트픽쳐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는, 이 이야기를 취재하며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한 두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지독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추상미 감독과, 탈북 과정에서의 상처를 잊고 싶은 소녀 이송. 두 사람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머물던 장소를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한 선생님들을 만나며 조금씩 자신들의 상처 역시 조금씩 치유해 나간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작업하며 산후우울증을 극복하기도 했어요. 아이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집착과 불안에 괴로웠는데, 이 모성이 내 아이만이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됐거든요. 어린 시절에 입은 상처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됐고, 배우가 되고 연기를 하면서 터져 나온 경험도 있었어요. 저는 송이도 이 영화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하길 바랐어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처음엔 송이가 마음의 벽을 닫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 성격도 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탈북자들은 국정원에서 한 달 정도 집요하게 과거의 이야기를 추궁 받는다더라고요. 상대를 배려하는 방식의 추궁이 아니고, 청소년들은 아무래도 예민하잖아요. 탈북 청소년들에겐 이 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다 있더라고요. 이걸 알고 나니, 송이에게 과거의 일들, 북한에서의 일들을 물었다는 게 미안했죠."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 그 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커넥트픽쳐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어주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고 부르던 교사들에게 폴란드어와 악기, 춤을 배우며 동심을 찾아갔다. 하지만 1959년, 북한의 '천리마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한은 아이들을 일제히 북한으로 송환했다. 아이들은 폴란드에 머물고 싶어 일부러 눈밭에 구르며 아픈 척도 해보고, 교사들에게 매달리기도 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다큐는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 중 상당수는 남한의 전쟁고아였다고 말한다.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북한은 점령 지역의 고아들을 데리고 갔고, 그중에는 전선이 서울 이남 지역으로 내려왔을 때 포함된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모두 북한으로만 돌아갔다.  

교사들은 아이들과 이별한 순간을 일생 중 가장 슬펐던 순간으로 기억했고,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들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다시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부탁을 편지에 적은 아이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원하는 답을 줄 수도 없었다. 송환 직후엔 이런 편지라도 오갈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송환 2년 뒤인 1961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편지가 끊기고 말았다. 

영화를 본 뒤, 많은 관객이 가장 궁금해할 이야기는 아무래도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의 삶일 것이다.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추상미 감독은 그들이 러시아어와 폴란드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북한 내에서 엘리트 그룹을 형성했고, 그중에는 폴란드 대사가 된 사람, 교환 교수가 되어 폴란드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다 전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지 궁금했다.   

"당시 전쟁고아들이 폴란드로만 갔던 게 아니잖아요. 루마니아로 간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때 북한 쪽 아이들을 인솔해간 남자 교사와 루마니아 여성이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일도 있었대요. 남자는 3년 후에 북한으로 송환됐고, 루마니아 여성은 평생 남편을 그리면서 생사도 모른 채 기다렸대요. 이분이 북한-루마니아 사전도 만드셨대요. 

영화엔 담지 못했지만, 북한 정부에서 폴란드 교사들에게 감사패를 수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폴란드 양육원에서 자란 아이가 북한 측 대표가 돼서 교사들을 만나고 돌아간 적도 있대요. 지난해 돌아가신 탈북민 중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폴란드 이민을 준비하셨다는 분의 이야기, 아버지가 폴란드 전쟁고아였다는 분, 제3국으로 탈북한 분 중에 폴란드 전쟁고아 출신이신 분...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요. 체코에도 북한 전쟁고아들이 머물던 고성이 있대요. 제가 다 할 수는 없고, 누군가 이 이야기를 계속 취재하고 알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통일을 꼭 바라는, 또 하나의 이유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사진.

폴란드 프와코비체 양육원 원장이었던 유제프 보로비에츠는 추상미 감독에게 "그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커넥트픽쳐스

 
추상미는 이번 작품을 연출하며 "우리 역사에 제대로 성찰되지 않은 지점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남북이 팽팽하게 맞서는 동안 서로 반목하느라 들여다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최근 급변한 남북 정세는 그동안 주목하지 못했던 다양한 주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약 4년의 영화 준비 기간,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친 남북 관계를 지켜본 심정도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2017년이었어요. 스태프도 없이 혼자 작업하는 것도 힘들었고, 아이도 소아 사춘기를 겪느라 말을 안 들었고, 혼자 반복해서 취재 테이프를 들여다보니 판단력을 잃어 감동이고 뭐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힘들었던 건 시국이었어요. 트럼프 대통령이랑 김정은 위원장이 당장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으르렁댈 때. 사회적인 분위기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도 다 끊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을 때였어요. 이런 때 이런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싶었죠. 그렇게 2018년이 됐는데, 정말 기적처럼 분위기가 바뀌었잖아요. 남북 정상회담할 때, 아마 국민들 중 제가 제일 크게 만세를 불렀을 거예요. (웃음)"


추상미 감독은 유제프 원장의 '그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말하며, "이 말씀이 내게는 통일이 되어야 하는 의미가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추 감독에게 '통일'이 추상적인 바람 정도였다면, 이 작품을 통해 더 강렬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또, 앞으로도 이 시기에 대한 영화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결심도 생겼다. 

"우리 근현대사에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고 넘어간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선은 <그루터기들> 작업을 해야겠지만, 이후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 한국 전쟁 등 근현대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담고 싶어요. 역사의 상처를 다르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동안 한국 전쟁의 상처를 그저 '증오'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면서 견고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면, 이젠 바뀌어야죠. 폴란드 선생님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은 개인의 상처들을,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품는 방식으로 선하게 사용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남한과 북한이 한국 전쟁의 상처로 나뉘었다면, 이제는 그 상처로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모두 겪은, 공동의 상처잖아요."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 커넥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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